대학 턱걸이 합격 선물, 아버지가 주신 등산학교 동계반 [등산시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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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방학이 지나고 고3이 됐다. 나를 포함한 3명 중 의대를 가겠다고 한 1명은 학교에서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나와 3명 중 공부를 가장 못했던 1명은 여전히 인공암벽 앞에서 서성이거나 같이 3교시에 도시락을 까먹거나 도서관에서 딴짓을 했다. 그렇다고 산에 가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다. 나를 자극하는 것이 하나 있긴 했다. EBS 문제집 뒤표지를 장식하고 있던 박영석 대장의 얼굴이었다. 뒤표지엔 그의 얼굴 말고도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도전한다'
나에게는 그것이 동국대학교 입학(고 박영석 대장은 동국대학교 산악부 출신이다)에 도전해 보라는 것으로 읽혔다. 그 뒤표지를 볼 때마다 '해볼까? 그래볼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따져도 내가 그때 동국대학교에 입학할 가능성은 0.5~0.7% 정도라는 데이터를 얻고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 데이터는 대부분 수학 성적에서 얻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2학년 때부터 이과와 문과로 나뉘었다. 본인의 수학이나 과학 성적과는 상관없이 친구들은 대체로 이과를 갔다(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남자 학생만 있는 '남고'였다). 총 12개 학급 중 5개 학급이 문과, 7개 학급이 이과였다. 취업이 잘 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장래희망이 뭐냐고 어른들이 물어보면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과학자가 되겠다'고 답했는데, 과학자가 되려면 이과를 가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에 큰 뜻 없이 대세에 휩쓸려 이과에 지원했다. 당시 또 문과로 가는 남학생 중 절반은 반에서 '잘 노는' 친구들이었다. 잘 노는 친구들은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다녔다. 바지를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거나 나팔바지를 입었다. 나는 무스가 없었다. 통이 큰 바지도 없었다. 엄마한테 나팔바지를 사달라고 졸랐다가 핀잔만 들었다. 문과는 내가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나의 수학 점수는 형편없었다. 몇 백 개의 문제를 풀거나, 수능 모의고사에서 오답노트를 만들어 외우거나, 과외 선생으로부터 집중 관리를 받아도 점수는 높아지질 않았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대신 나는 말수가 줄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누구와도 단 한마디 하지 않는 날이 있었고, 어떤 날은 누구와도 단 한마디 말을 나누지 않겠다!와 같은 해괴한 시합을 나 자신과 벌이고선 이긴 적이 여러 번이었다. 몇 안 되는 친구들은 나를 가리키면서 '저 놈 묵언수행 중'이라면서 건드리지 않았다.
'누구와도 단 한마디 말을 나누지 않겠다'고 결심한 어느 날 점심시간, 나는 햇빛이 쏟아지는 운동장 스탠드에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았다. 거긴 높이가 꽤 높았다. 그 위에서 애들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거나 농구를 하는 걸 가만히 내려다봤다. 하늘에서 선한 기운을 가진 어떤 물체가 내려와 혼자서 오도카니 있는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너 왜 그러고 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체가 또 물었다. "너 대학 갈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체는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계단엔 나와 노란색 햇빛만 머물렀다. 나는 슬프지 않았고 즐겁지도 않았다. 나무가 이런 기분일까? 나는 얼굴에 눈이 달리지 않은 것처럼 시각적인 것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따뜻함을 즐겼다. 머리 끝에서 민들레 홀씨 같은 것이 자라는 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 그 씨앗이 어딘가로 잘 날아가길 기다리듯 목을 길게 뽑아 들고 햇빛을 즐겼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중에 '어른이 되면 어떤 직업을 가지면 좋을까?' 가끔 생각했다. 매달 집으로 날아오는 '디딤돌 문제집' 부록으로 <대학교 전공에 따른 진로> 뭐, 이런 제목의 책이 배달됐다. 나는 이 책을 뒤적이면서 앞으로 내가 가질 직업을 슈퍼마켓에서 과자 고르듯 골똘히 골랐지만 아! 도무지 눈길을 끌거나 맛있어 보이거나 재미있는 게 없었다. 학교 성적이 좋다는 가정을 하고 둘러봐도 모두 그저 그랬다. 의사? 좋지. 그런데 사람 몸을 헤집는 건 싫어! 과학자? 어떤 과학자? 과학자 종류는 너무 많잖아? 소설가? 나는 이과잖아! 사람은 꼭 직업을 가져야 하는 건가? 결혼을 해야 하는 건가? 돈을 벌어야 하는 건가? 이해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선생님이 일러준 대로, 모든 어른이 그렇게 하라는 대로 대학교에 가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대학교는 아주 약간 가고 싶었다. 그래야 이 의미 없는 한 단락을 끝낼 수 있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부모님도 나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내가 몰래 담배 피우거나 술 마시거나 머리에 무스를 바르는 등 다른 박자를 타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는데, 가끔 나를 향한 한숨 소리인 것 같은 '하아' 혹은 '휴우' 소리를 듣기는 했다.

11월이 왔다. 결국 수능을 망쳤다. 그럴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그 정도로 망칠 줄은 몰랐다. 나는 나에게 대단히 놀랐다. 너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3 담임을 연속 3년째 하면서 이때까지 가장 많은 학생을 대학교에 보냈다고 자랑한 당시 나의 담임 선생님은 학교에 불려온 엄마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이 학교에서 고3 애들을 대학교에 가장 많이 보냈습니다. 저를 믿으세요!"
나는 담임 선생님을 믿었다. 덕분에 지방에 있는 한 대학교 공대에 겨우 붙었다.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나는 하늘에 있는 신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오, 신들이시여, 감사합니다. 지긋지긋한 도서관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의 세상을 환하게 밝혀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면 산악부실에 한번 가보겠습니다.'
물론 담임 선생께도 고맙다고 인사했다.
아버지는 드디어 아들이 4년제 대학에 가게 됐다며 좋아했다. 의아했던 나는 가만히 있었다. 아버지는 진짜 기분이 좋았던 모양인지 겨울 방학 때 나를 '한국등산학교 동계반'에 보냈다. 이것이 벌인지 선물인지 분간할 수 없어 여전히 의아한 채 나는 아버지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이것을 계기로 고등학교 산악부 형들과 다시 만났다. 형들은 내가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사실보다 한국등산학교 동계반에 가게 됐다는 것에 더 놀라워하며 축하했다. 어떤 형이 나에게 코플라치(빙벽화, '이중화'라고도 불렀다)를 빌려줬다. 어떤 형은 트랑고 바일을 빌려줬고, 누군가는 크램폰(빙벽등반용 12발 아이젠)을 빌려줬고, 누구는 또 오리털 침낭을 빌려줬다. 엄마는 나에게 쌀과 김치를 싸줬다. 아버지는 그저 "잘 갔다 와"라고 말했다. 2년 전 여름에 멨던 '카라반' 배낭이 금세 꽉 찼다. 무거웠다. 어린 나이에 이런 걸 메도 되는지, 이러다가 키가 멈추는 게 아닌지 나는 계속 의아해 했는데, 고개를 끊임없이 갸우뚱 갸우뚱 하는 사이 어느새 나는 속초 설악동에 있는 '동산장(당시 한국등산학교 동계반 교육생들이 묵었던 여관)'의 어느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교육생 중 내가 막내였다. 강사들은 고등학생이 들어왔다며 반겼다. 그러면서 무지막지하게 훈련을 시켰다. 새벽마다 일어나서 코플라치를 신고 구보를 했다. 매일 아침 설악동에서 목우재까지, 혹은 비룡폭포, 소토왕골, 토막골 등지까지 코플라치를 신고 걷게 했다. 딱딱했던 빙벽화 때문에 발에 물집이 잡혔다. 고등학생한테 이런 걸 시켜도 되는지 나는 의아했지만 강사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교육 과정의 절반이 지났을 무렵 코플라치를 신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양폭산장으로 올라갔다. 나는 집에 가고 싶었다. 나와 같은 조였던 대학교 산악부 형들도 비슷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모두 표정이 처참했다. 강사들은 우리 기분은 아랑곳 않고 양폭산장 근처의 거의 모든 얼어붙은 폭포로 우리를 끌고 갔다. 염주폭, 은폭, 천당폭 등등. 주변은 온통 얼어붙어 있었고 눈에 덮여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허우적 대면서 강사들이 시키는 대로 닥치는 대로 수직으로 이뤄진 빙벽을 기어 올랐다. 몇몇 강사가 나보고 잘한다고 칭찬했는데, 나는 그것이 진짜인지 의아해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교육 막바지에 이르러 죽음의 계곡으로 올라갔다. 강사 중 한 명이 "눈사태 때문에 여기서 사람이 많이 죽었고, 그래서 이름이 죽음의 계곡이 됐다"고 설명했다. 나는 강사가 시키는 대로 건폭을 오르고 눈밭에 뒹굴면서 피켈을 휘둘렀다. 나는 의아했다. '아버지는 이곳이 뭐하는 곳인지 정확히 알고서 나를 보낸 걸까?' 그러면서 이건 아버지가 나에게 내린 일종의 '벌'이란 걸 깨달았다.
죽음의 계곡에서 내려온 다음 교육이 끝났다. 무려 일주일 동안 설악산에 있었다. 나는 입술이 터졌고 얼굴이 퉁퉁 부었다. 그런데 입에선 양폭산장에서 배운 산노래가 흘러 나왔다.
"잘 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나는 속으로 웃었다. 풉! 설악산에 다시 올 날이 있을까? 없을 것 같았다.
집에 가니 부모님은 내가 잠깐 여행을 갔다온 것처럼 대했다. 난생 처음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고난을 겪은 것과 비교했을 때 세상은 너무 잠잠했다. 말랑말랑한 운동화는 천국의 신발 같았고, 푹신하고 따뜻한 침대는 내가 아직은 한참 어린 나이라는 걸 깨닫게 했다. 내가 고생한 것과 달리 친구들은 안온하고 즐거운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컴퓨터로 게임을 하거나 오락실을 가거나 농구를 하거나 등등. 나는 설악산에서 겪었던 일을 친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해 봤자 그게 뭔지 몰랐을 테니까. 이런 식으로 나는 친구들과 사이가 더 벌어졌다.
개학을 했다. 친구들은 대체로 표정이 좋았다. 나머지 산악부 친구 2명 중 1명은 계획대로 의대에 붙었다. 공부를 가장 못했던 나머지 1명은 나보다 더 먼 지방에 있는 학교에 합격했다. 그 녀석은 싱글벙글했다. 곧 졸업식을 했고, 우리 셋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우리는 잘 만나지 못했다.
나는 집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정도 가야 하는 대학교에 갔고 입학식에 참여했다. 내가 무슨 과에 속했든 누가 나와 동기든 별 관심이 없었다. 작은 체육관에서 치러진 입학식이 끝나고 나는 곧장 학생회관으로 갔다. 산악부가 4층에 있었다. 이 대학교에 산악부가 있다는 건 미리 알지 못했다. 그저 저 건물로 가면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고등학교 산악부 형들처럼 온화할까? 안경을 끼고 공부를 잘하게 생겼을까? 혹시 여자 회원도 있을까? 입학식장에 들어서는 것보다 더 떨리고 설.다. 인류 처음으로 달 표면에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이 된 기분이었다. 두근두근대는 마음을 부여잡고 동아리방 문을 두드렸다. 문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문 곳곳에 긁힌 상처가 보였다. 땀냄새 비슷한 게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둡고 탁한 기운이 문 아래 틈에서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문 안쪽에선 기척이 없었다. 얼마간 기다렸다. 아무도 없었다. 문은 잠겨 있었다. 복도엔 사람도 없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대학교 근처에 있던 큰아버지 댁으로 갔다. 여러 모로 의아했던 겨울 끝에서 겨우 뭉툭한 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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