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원청 사용자성 지우기’ 한수원, 자회사 과업지시서 ‘싹 갈았다’

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노조법) 시행 전 한국수력원자력이 원청 사용자성을 지우기 위해 자회사 과업지시서(시방서)를 대폭 수정한 사실이 확인됐다. 자회사 노동자들의 근무시간·작업방식·근무일지 등을 삭제하는 방식을 썼다. 개정 노조법 시행을 앞두고 자회사 노조의 교섭을 회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임금자료 제출, 자회사와 노동조건 협의" 조항도 빠져
15일 <매일노동뉴스>가 한수원의 자회사인 퍼스트키퍼스·시큐텍의 과업지시서를 전종덕 진보당 의원에게 받아 확인해보니, 하청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관련한 조항이 지난해에 비해 대폭 줄었다. 퍼스트키퍼스는 울진·경주·영광·고리 등 한수원의 원자력발전소와 전국 각지 양수·수력발전소 등에서 환경미화와 시설관리 등을 맡는 자회사다. 시큐텍은 특수경비원들이 고용된 경비·보안전문 자회사다.
과업지시서 개정 시점은 '2026년 3월'로 알려졌다. 노조법 시행일인 이달 10일을 앞두고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한수원의 일반 과업지시서에서는 자회사 노동자를 지휘감독·노무관리하는 현장책임자를 선임해야 한다는 규정이 3조에 명시돼 있었다. 이와 달리 개정 작업지시서에서 '현장책임자'는 자회사 관리자를 지칭하는 '현장대리인'으로 바뀌었고, 지휘감독·노무관리 역할도 빠졌다. 또 "종업원의 임금지급현황(계좌이체 내역서 등 증빙서류)은 매월 기성고 신청시 서면으로 제출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4조(기록 관리 및 특이사항 통보)도 삭제됐다.
한수원과 자회사가 자회사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협의'할 수 있다는 취지의 기존 조항들도 다 없앴다. "발주자와 계약상대자는 (자회사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보호와 관련된 확약내용의 이행 여부) 점검결과 미흡한 사항에 대한 시정 내지 보완을 위한 조치를 상호 협의해 시행한다"는 5조(업무점검, 관리 및 조치), "계약상대자는 업무의 특성을 고려해 발주자와 합의해 근무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는 11조(근로조건 및 복무규정)가 대표적이다.
개정 노조법 2조2호는 "근로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근로자의 근로조건에 대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도 사용자로 본다. 이에 따라 10일부터 하청노조들도 원청에 교섭을 요구할 수 있고, 사용자가 지배·결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교섭할 의무가 부여된다. 한수원은 노조법상 사용자로 간주될 수 있는 과업지시서 내용을 삭제 또는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자회사 출·퇴근시간, 작업방식 등 전부 수정
노조 "법 개정 취지 정면 배치, 기만적인 행동"
각 사업장별로 적용되는 퍼스트키퍼스 특기 과업지시서의 바뀐 내용을 보면 개정 노조법상 사용자가 되지 않으려는 의도가 더 짙게 보인다. 자회사의 출·퇴근시간과 작업방식, 업무 체크리스트들을 통으로 없앴다.
지난해 한수원 고리(부산)본부 과업지시서를 보면 청소 구역별 출·퇴근시간을 명시하고 있다. 발전소를 청소하는 노동자들은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7시30분에 출근해 오후 4시30분에 퇴근하고, 사옥을 청소하는 노동자들은 오전 6시30분에 출근해 오후 3시30분에 퇴근하게 돼 있었다. 과업지시서 개정으로 없어진 항목이다.
개정 전 과업지시서는 청소작업의 기준도 정했다. 발전소 사무실과 휴게실 바닥은 수시로 쓸어야 하고, 옥상은 하루에 한 번, 재떨이 청소는 하루에 두 번 하라는 식이다. 청소기와 폐기물 수거용 차량 등 필요한 장비의 목록과 수량도 자회사 과업지시서에 있었지만 사라졌다.
시큐텍의 특기 과업지시서도 매한가지다. 우수맨홀 넘침 여부를 월 1회 점검하고, 필요시 사옥이나 스포츠 문화센터 내 가로수를 점검하는 등의 작업기준이 개정 과업지시서에서 없어졌다. 차량 운행일지와 시간외 근무일지 등 과업지시서에 첨부돼 있는 각종 일지들도 없앴다.
황지민 공공연대노조 경북본부 선전국장은 "실제로 사용자성을 줄이기 위한 조치라고 자회사 관계자들도 인정하는 상황이었다"라며 "한수원이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전혀 통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용자성을 부정할 것으로 보이는데, 노조법 개정 취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기만적인 행동"이라고 말했다.

한국공항공사도 "직접 지휘·명령 금지해야" 보고서
"본질 바뀌지 않아" "사용자성 판단 영향 없어" 전망도
퍼스트키퍼스에는 1천450여명, 시큐텍에는 1천50여명의 하청노동자들이 일한다. 문재인 정부 시절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으로 각 사업장마다 다른 용역업체에 있던 노동자들이 두 개의 자회사 소속이 됐다. 자회사로 전환되지 않은 경상정비·소방점검 등 용역업체 노동자를 포함하면 한수원의 하청노동자는 더 많다.
한수원이 자회사 노동자들의 교섭할 권리를 미리 앗아가려 시도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종덕 의원은 "공기업이 법 취지에 역행해 책임 회피의 선례를 만든다면 노동현장의 혼란과 갈등만 키울 뿐"이라며 "한수원은 즉각 책임 회피를 중단하고 노동자들의 정당한 원청교섭 요구에 성실히 응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런 시도를 한수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지가 박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받은 한국공항공사의 '노조법 시행 대응 종합보고서'(2025년 12월)에 따르면 공사는 "(자회사) 사람에 대한 직접 관리를 차단하고, 계약 및 성과 중심의 관리체계로 전환해야 한다"며 △지휘·감독 등 오해 소지가 있는 용어를 협의·요청으로 순화 △직접 지휘·명령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계약서나 과업내용서를 표준화하는 방안이 담겨 있다. "모든 업무 요청은 자회사 관리자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 부분도 한수원의 전략과 같다.
다만 공기업들의 이런 조치가 실제 사용자성 판단에는 별 영향이 없을 거라는 분석이 있다. 정기호 민주노총 법률원장은 "사용자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한 눈속임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원청이 하청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지배·결정했다면)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원청 사용자로서의 증거를 노조가 더 수집하게 만드는 효과는 있겠다"고 말했다.
한수원은 논란에 대한 답변을 거부했다. 한수원 관계자는 '과업지시서를 수정한 이유가 뭐냐' '수정된 과업지시서가 원청의 사용자성을 축소한다는 비판이 있다'는 취지의 본지 질의에 "별도로 줄 입장이 없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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