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주 임신중지’ 유죄…정부-국회 ‘책임 회피’에 제도 공백 7년째 [뉴스AS]
‘임신중지 약물 도입’ 책임 떠넘기기

임신 36주차에 임신중지 수술을 받은 20대 산모 권아무개씨가 최근 살인죄 공범으로 유죄가 인정된 것과 관련해 제도적 공백 탓에 피해자가 계속 늘어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현정 변호사(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기획운영위원)는 15일 한겨레에 “정부와 국회가 할 일을 하지 않아 피해는 (임신중지) 당사자들이 보고 있다”며 “후기 임신중지를 하는 상황은 임신 사실을 늦게 알 수밖에 없는 고립된 환경에 놓여 있거나, 경제적 문제 등 접근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권씨는 사건 당시 별다른 소득이나 재산이 없었고, 오랫동안 가족과 단절된 상태였다.
재판부도 권씨를 상대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면서 ‘제도적 허점’을 지적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는 지난 4일 재판에서 “위기 임산부에 대한 사회적·구조적·법적 보호 장치가 부족하다고 보여 이번에 한해 집행유예를 선고한다”며 “임신 여성이 언제까지 어떤 사유로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규범적 공백이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의 지적처럼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여성의 임신중지권은 7년째 방치돼 있다. 문제는 이를 해결할 국회와 정부가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임신중지 제도 개선에 대해 부처 간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보건복지부·성평등가족부·법무부·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지난해 9~10월 두 차례 회의를 열어 임신중지 약물 허용 여부, 임신중지 허용 주수 등을 포함한 제도 개선 방안을 논의하기는 했다. 성평등부 관계자는 “관계부처와 필요 시 수시로 회의 및 협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신중지 약물 도입은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다. 하지만 의약품 허가 주무 부처인 식약처가 ‘법 개정 우선’을 고수하면서 심사가 미뤄지고 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식약처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식약처는 2021년∼2023년 총 6건의 외부 법률 자문을 받았고, 이 중 4건이 모자보건법과 형법 개정 없이도 임신중지 의약품 품목허가를 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식약처 관계자는 “약물에 의한 임신중지 허용이나 임신중지 허용 기간이 법률로 정해져야 효능·효과, 위해성관리계획 등에 대한 허가 심사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먼저 법 개정을 해야 한다는 입장인 셈이다.
국회는 이제야 논의의 첫발을 뗐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낙태죄 대체법안’이 22대 국회에서 발의된 지 8개월 만인 지난 11일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국회에는 임신 주수와 상관없이 약물에 의한 임신중지를 허용하고, 보험급여를 적용하는 내용의 모자보건법 개정안 등이 계류돼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선제적으로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최현정 변호사는 “임신중지에 대해 배우자, 보호자 등의 동의를 의무화한 ‘모자보건법 14조’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이후 효력이 사라졌지만 입법이 미뤄지며 현장에는 여전히 동의를 필수로 하는 의료 관행이 남아있다”며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임신중지가 가능한 의료기관 정보를 공지하는 건 법 개정 없이도 복지부 등이 실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영 셰어 대표도 “임신중지 시술은 어떻게 할 건지, 병상은 얼마나 있는지, 시술 도구는 무엇이 있는지 등 현 보건의료체계에서 임신중지에 필요한 것들을 정부가 조사부터 해야 한다”고 했다.
국정과제로 지정된 임신중지 약물 도입에 식약처가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동근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부대표는 “의약품에 효능·효과를 명시할 때 법률 근거를 요구하는 약은 없다. 이미 100개국 가까이 도입된 임신중지 의약품에 대한 허가 심사를 미루는 것 자체가 의료 접근성을 저해하는 것”이라며 “약물 도입은 식약처의 허가로 가능하다. 이번 정부 국정과제 중 가장 빠르게 수행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고나린 기자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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