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 분석해 질병 치료하는 ‘진단검사의학’] 내 안에 다 있다… ‘피’할 수 없는 증거

차상호 2026. 3. 15.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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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와 접촉하는 혈액, 신체기능 떨어지면 흔적 남겨
간→효소, 콩팥→크레아티닌, 심장→트로포닌 분비
채혈로 질환 판단… 수치로 이상 징후 발견해 치료
패혈증 프로칼시토닌 지표·암 표지자 검사 대표적

경남에 사는 58세 직장인 A 씨는 지난해 건강검진에서 1분당 혈액 여과량을 나타내는 사구체여과율(eGFR) 수치가 예년보다 낮아졌다는 결과를 받았다. 별다른 자각 증상은 없었지만, 의료진은 수치의 추세를 근거로 신장내과 진료를 권유했다. 다행히 조기 치료를 시작한 A 씨는 “6개월만 늦었어도 결과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담당의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환자가 병원을 찾으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은 채혈실이다. 그 혈액과 소변을 분석하는 곳이 진단검사의학과다. 창원한마음병원 진단검사의학과 송두열 교수는 “임상적 의사결정의 70%가량이 검사실에서 나온 숫자에 의존한다”며 “어떤 약을 쓸 것인지, 수술을 서두를 것인지, 퇴원을 허락할 것인지, 치료의 방향과 성패를 결정짓는 기준점이 바로 이 데이터”라고 강조했다.

/챗GPT·아이클릭아트/

진단검사의학은 △임상화학·면역학(혈당, 간·신장 기능, 암 표지자) △진단혈액학(백혈병, 빈혈, 응고 장애) △임상미생물학(세균·바이러스 감염) △분자유전학(유전자 돌연변이) △수혈의학까지 아우른다. 사실상 모든 진료과의 판단을 뒷받침하는 곳으로, 가장 많은 데이터를 가장 빠르게 다루는 곳이다.

채혈 한 번으로 수십 가지 질환을 선별할 수 있는 이유는 혈액의 순환성 때문이다. 체중의 7~8%를 차지하는 혈액은 온몸을 돌며 장기와 접촉한다. 폐에서는 산소를, 소장에서는 영양소를 싣고 간과 콩팥을 지나며 대사 산물과 노폐물을 처리한다. 우리 몸 안의 모든 생화학적 사건은 혈액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간이 손상되면 간세포 안에 있던 효소(AST, ALT)가 혈액으로 흘러나온다. 콩팥 기능이 떨어지면 걸러내지 못한 크레아티닌이 혈중에 쌓인다. 심장 근육이 손상되면 트로포닌이 방출된다. 세균이 침입하면 백혈구 수가 급격히 변하고 염증 단백질이 상승한다. 암세포는 특정 단백질을 혈액으로 분비한다. 송두열 교수는 “어느 장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신호는 혈액에 실려 순환한다”며 “특정 물질의 농도가 정상 범위를 벗어났다는 것은 그 물질을 만들거나 처리하는 장기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진단검사의학의 핵심 역할은 증상이 나타나기 전 이상을 포착하는 데 있다. 대표적인 것이 콩팥이다. 콩팥은 기능의 70%가 소실될 때까지 신호가 없는 ‘침묵의 장기’다. 부종이나 피로를 느낄 때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eGFR(사구체여과율) 수치의 미세한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송두열 교수는 “정상(90 이상)에서 60 아래로 떨어지면 만성 콩팥병 3기, 30 이하는 4기로 분류돼 치료 전략이 완전히 바뀐다”고 말했다.

응급실을 방문한 환자의 심전도가 정상이라도 트로포닌 수치가 높다면 수 시간 내 발생할 심근경색의 전조로 판단해 즉각 처치에 들어간다. 트로포닌은 심장 근육이 손상될 때 혈액으로 흘러나오는 단백질인데, 심근경색이 발생하면 심전도에 변화가 나타나기 수 시간 전부터 트로포닌이 혈액으로 방출되기 시작한다. 수치가 상승한 환자는 향후 48시간 내 심근 손상 위험이 급격히 커지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의 처치 여부가 예후를 결정한다고 한다.

패혈증 의심 환자에게서는 프로칼시토닌이 지표다. 고열과 전신 염증 반응만으로는 단순 세균 감염인지, 혈류를 타고 전신으로 번진 패혈증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송두열 교수는 “프로칼시토닌은 세균 감염 시 급격히 상승하는 단백질로, 수치가 높을수록 패혈증의 중증도와 연관성이 높다”며 “이 수치를 기준으로 항생제 투여 강도와 치료 방향이 결정된다”고 설명했다. 암 표지자 검사도 중요한 축이다. PSA(전립선 특이 항원), CA-125(난소암), CEA(대장암·폐암), AFP(간암) 등의 수치는 암의 존재를 직접 증명하지는 않지만, 위험군을 추려내고 치료 경과를 추적하는 핵심 근거가 된다고 한다.

최근 진단검사의학은 첨단 자동화 시스템 도입으로 검사 속도와 정확도를 비약적으로 높였다. 하지만 장비가 정밀해질수록 이를 해석하는 전문의의 통찰력은 더욱 중요해진다. 송두열 교수는 “자각 증상이 없다고 수치를 가볍게 여기는 분들이 많지만 한 해 한 해 쌓인 수치의 흐름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경고”라며 “수치가 정상 범위 안에 있더라도 방향이 중요하다. 매년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신호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령화와 만성 질환 증가로 조기 진단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증상이 나타나기 전 수치의 변화를 추적하고, 그 흐름에서 위험 신호를 읽어내는 진단검사의학의 핵심 역할이다. 송 교수는 “진단이 정확해야 치료 방향이 서고, 치료 방향이 서야 환자의 예후가 달라진다”고 강조했다.

차상호 기자 cha83@knnews.co.kr

도움말= 창원한마음병원 진단검사의학과 송두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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