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AI로 극지 자율운항…한국은 규제에 발 묶여
- 전기 추진 컨선 2명으로 운항
- 유빙 등 위험장애물 자체회피
- AI 시스템이 유지보수비 낮춰
- 북극정책·해양법 연구도 선도
- 대러 제재 등 리스크 관리대비
- 부산에 LNG 벙커링 허브 제안
북극항로 시대가 열린다. 그 문을 미는 힘은 지정학적 전략과 해양 AI 기술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와 호르텐 현장 취재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북극항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아니라, 정교한 전략과 기술로 개척할 수 있는 항로였다.

▮리스크를 알아야 길이 보인다
지난 4일(현지시간) 방문한 노르웨이 오슬로 외곽의 프리초프 난센 연구소(FNI)는 북극정책 국제해양법 기후변화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연구기관이다. 전설적인 북극 탐험가 난센의 저택을 개조한 이 연구소는 입구부터 묵직한 역사의 무게가 느껴졌다. 고풍스러운 목조 계단을 올라 회의실에 들어서자, 벽면에는 100년 전의 북극 지도와 최근 지도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FNI는 1990년대 초반부터 북극항로의 경제성과 타당성을 검토하는 국제기초연구를 주도했다. 1987년 소련(현 러시아)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무르만스크 연설에서 북극항로(NSR)를 국제상업항로로 개방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계기였다. 냉전시대 군사적 대치 공간이었던 북극은 이후 상업적·경제적 이용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유빙이라는 물리적 한계와 소비에트 해체로 인한 정정 불안으로 논의가 한동안 멈췄다. 온난화가 진행되고 러시아가 2010년 에너지 운송항로로 개발에 나서면서 중국·인도·유럽·일본 등 주요국 에너지 기업들이 속속 참여했고, 한국도 항만·조선 기술을 앞세워 핵심 협력국으로 부상했다.
현재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러 제재로 한국 선사의 직접 참여가 제약받는다. 북극항로 구간 대부분이 러시아 배타적경제수역(EEZ)에 속해 러시아 국영기업 로사톰의 쇄빙선과 통항 허가가 필요하다는 점도 현실적 변수다.
FNI 전문가들의 시각은 비관과 거리가 멀었다. 아릴 모에 연구교수는 “세계 2위 환적 항만, 밀집한 수리조선 업체, 쇄빙선 건조 능력을 갖춘 부산은 북극항로가 열릴 때 세계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할 역량을 이미 갖췄다”고 평가하며 LNG·수소 벙커링 허브 전략을 제안했다. 북극항로는 현재도 LNG 에너지 화물 중심으로 활용이 확대되며, 기후변화로 인한 해빙 가속화는 하계 운항 가능 기간을 매년 늘린다. 여름철 집중 운항부터 단계적으로 정례화하는 하이브리드 전략이 현실적 출발점으로 제시된다.
북극이사회 옵서버 국가로서 한국의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해줄 것도 주문했다. 이단 웡 연구원은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큰 지금이 오히려 정책 기반을 다지고 국제 네트워크를 구축할 적기다. 리스크는 관리의 대상이지, 포기의 이유가 아니다”고 했다.
▮해양 AI, 북극항로 개척의 열쇠
다음 날 방문한 오슬로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의 항구도시 호르텐은 인구 3만 명의 소도시다. 이곳의 콩스버그마리타임(Kongsberg Maritime)은 선박 자율운항·디지털 트윈·해양 센서 분야 글로벌 1위 기업이다. 이 회사는 현재 자율운항 전기 추진 컨테이너선 아스코호를 실제 운항 중이다. 원격 관제 시스템을 통해 호르텐항과 모스항을 하루 네 차례 왕복하며 생필품을 운송하는데, 선내 인원은 항해사와 안전요원 단 두 명뿐이다. 선박 스스로 위치를 잡는 시스템 덕분에 닻줄도, 예인선도 필요 없다.
원격제어센터에서는 기술진이 위성 기반 시스템으로 출항부터 접안까지 전 과정을 통제했다. 자동 충돌방지 시스템 역시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모르텐 하소스 시니어 프로젝트 매니저는 “유빙을 포함해 충돌 가능한 모든 장애물을 회피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 중이며, 이미 일부 구간에서 실제 운항에 적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기술이 북극항로에 갖는 의미는 결정적이다. 북극항로는 극한 기상 조건, 유빙, 통신 불안정 등 항해 위험 요소가 집중된 구간이다. 상용화의 가장 높은 장벽으로 유빙 항법에 숙련된 선원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이 꼽힌다. AI 자율운항은 이 구조적 한계를 해소하는 동시에, 혹한·유빙 환경에서 발생하는 선체 손상을 예측·최소화한다. 극지 운항 선박은 저온 환경과 빙하 충돌로 인해 유지보수 비용이 일반 선박 대비 20~30% 높은데, AI 기반 예측 정비 시스템은 이 비용마저 낮출 수 있다.
콩스버그마리타임은 이 같은 성과를 위해 호르텐 시·노르웨이 국방연구기관(FFI)·대학과 협력해 2017년 자율운항 선박 테스트베드(규제 자유구역)를 구축했다. 기술 혁신이 민·관·학 협력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부산이 쥐어야 할 두 개의 나침반
노르웨이가 부산에 건넨 메시지는 명확하다. 북극항로 개척의 두 축은 ‘정책’과 ‘AI 기술’이다. 부산항은 이미 태평양·아시아-유럽(수에즈) 두 항로가 교차하는 세계 2위 환적 항만이다(2025년 컨테이너 처리량 약 2488만 TEU). 여기에 북극항로가 더해지면 태평양·인도양·북극해를 잇는 세계 3대 간선 항로가 유일하게 집결하는 ‘글로벌 환승역’으로 도약할 수 있다. 2024년 국내 최초 LNG 벙커링 동시 작업(SIMOPS)에 성공한 데 이어 그린 메탄올·암모니아 벙커링 인프라까지 단계적으로 구축한다면 아시아 친환경 연료 환적 거점으로서의 위상도 굳힐 수 있다.
부산은 아직 출발선 가까이에 있다. 자율운항 선박 관련 규제 혁신은 물론 실증 개발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다. 부산 전역을 규제 프리존으로 지정하고 관세·법인세 감면 등 글로벌 기업 유치 특례를 담은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은 이 모든 구상의 법적 토대지만, 국회에 2년 가까이 계류 중이다. 허윤수 부산연구원 부원장은 “자율주행차가 도로를 달리려면 도로교통법부터 바꿔야 하듯, 자율운항 선박도 관련 규제를 전면 재정비해야 한다”며 제도 마련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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