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일상을 지탱하는 문화의 영토

경기일보 2026. 3. 15.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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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실천의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들을 자주 목격한다.

갈 곳 없는 시민들이 카페를 전전하는 현실은 우리의 문화적 빈곤을 드러낸다.

동네의 작은 평상, 놀이터와 작업실 같은 소박한 장소들이 마을 곳곳에 자리할 때 문화는 일상의 숨구멍이 된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 중요성을 말해 왔지만 충분히 성실하게 다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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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주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우리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실천의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들을 자주 목격한다. 따라서 다소 뻔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고자 한다. 사람이 머무는 공간도 그중 하나다. 공간은 삶을 조용히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서포터다. 특히 삶이 흔들릴 때 우리는 그 존재를 비로소 절실히 깨닫게 된다.

눈앞의 세계는 좀처럼 평온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포성과 급격한 격변은 개인을 끝없는 불안 속으로 밀어넣는다. 거대한 시대의 흐름과 변화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이제 많은 이들에게 일상이 됐다. 마음은 쉽게 내면으로 침잠하고 타인과의 연결은 느슨해진다. 그러나 인간은 고립된 채로는 치유될 수 없다. 두려움이 깊어질수록 가장 강력한 저항은 일상의 연대에서 비롯된다. 그 중심에는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물리적 공간이 있다. 공간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탱하고 타인과 연결하며 문화가 싹트는 토양이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사건보다 공간의 색채와 온도로 남는다. 놀이터의 모래 질감, 슈퍼 평상의 안온함, 시골길의 풀 냄새 같은 감각들이 한 인간의 세계를 형성한다. 문화란 거창한 예술만을 뜻하지 않는다. 특정 공간이 주는 기억과 경험은 삶의 결을 만들고 정체성의 뿌리를 이루는 과정 자체다. 공간의 미학은 결국 우리의 기억이 머무는 집과도 같다.

내가 애정을 느끼는 풍경은 담벼락 사이로 작은 집들이 어깨를 맞댄 오래된 골목이다. 그곳에는 급격한 변화가 침범하지 못한 시간의 결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네일수록 편히 머물 공간은 부족하다. 낡은 골목은 ‘낙후’라는 이름 아래 재개발을 기다리는 대기소가 되고 공간이 사라지면 그곳에 깃든 문화적 기억도 함께 지워진다. 주민들은 다시 고립된 섬처럼 남겨진다. 보존의 가치를 말하면서도 개발의 논리 앞에서 이를 가장 먼저 포기해 온 우리의 선택이 만들어 낸 풍경이다.

지역 곳곳에는 함께 책을 읽고 취미를 나누며 각자의 삶을 가꾸는 커뮤니티가 살아 움직인다. 이들에게 문화는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들이 모일 공유 공간은 여전히 부족하다. 갈 곳 없는 시민들이 카페를 전전하는 현실은 우리의 문화적 빈곤을 드러낸다. 진정한 지역 개발은 숨은 공간을 발굴해 사람들이 머물고 사색하며 취미를 나눌 수 있는 ‘문화적 정거장’을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 동네의 작은 평상, 놀이터와 작업실 같은 소박한 장소들이 마을 곳곳에 자리할 때 문화는 일상의 숨구멍이 된다. 거대한 랜드마크보다 중요한 것은 집 근처에서 슬리퍼를 신고 나설 수 있는 작고 단단한 공간이다.

공간이 주민들에게 어떤 색채와 온도로 기억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철학이 부재한 곳에서는 지속가능한 문화도 형성될 수 없다. 공간이 환대의 기운을 품을 때 사람들의 마음도 결을 달리한다. 타인을 경계하던 눈빛은 인사로 바뀌고 좁아졌던 생각의 지평은 타자의 삶을 향해 넓어진다.

두려움을 이겨낼 힘은 우리 발밑의 단단한 공간에서 시작된다. 이제는 삶의 존엄과 문화를 함께 짓는 공간의 미학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 중요성을 말해 왔지만 충분히 성실하게 다루지 못했다. 당위적인 표어에 머물렀던 공간의 가치를 삶의 최전선으로 끌어올릴 때 사색의 틈과 연대의 장이 마련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거친 파도를 견뎌 낼 마음의 근육을 회복하게 된다. 우리 곁에 누구나 머물 수 있는 따뜻한 쉼터가 채워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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