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아니다, 실패도 아니다… 조금 부족했을 뿐 태극전사들은 최선을 다했다 [2026 WBC]
세계는 150km+ 강속구 시대… 뼈저리게 느낀 '구속 혁명'의 벽
"미안하다" 고개 숙인 류현진… 대투수가 남긴 18년의 헌신
문보경·김도영·안현민·조병현·고우석이 증명한 희망의 빛
콜드게임이 아쉬울 뿐... 태극전사들이 고개 숙일 이유가 없다

[파이낸셜뉴스] 마이애미 론디포파크의 조명이 꺼지고 전광판에 0-10이라는 차가운 숫자가 새겨졌다.
17년 만에 밟아본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8강 무대는 1조 원이 넘는 메이저리그 초호화 군단의 벽 앞에서 콜드게임이라는 쓰라린 마침표를 찍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참사라 부르고, 누군가는 실패라고 쉽게 재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률의 벼랑 끝에서 최소 실점률을 뚫고 기어코 마이애미행 전세기에 올랐던 29명 태극전사들의 간절했던 투혼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라면 결코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없다.
참사도, 실패도 아니다. 그저 세계의 높은 벽 앞에서 우리의 전력이 아주 조금 부족했을 뿐, 선수들은 그라운드 위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최선을 다했다.

애초부터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가뜩이나 얇은 선발진에서 마운드의 기둥이 되어주리라 믿었던 '원투펀치' 문동주와 원태인이 부상으로 낙마하며 시작부터 거대한 암초를 만났다. 손주영마저 부상으로 이탈했고, 뒷문을 든든하게 걸어 잠가줄 마무리로 꼽혔던 오브라이언은 끝내 대표팀 합류를 고사했다.
마운드 자체가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 결국 유영찬 등을 급히 수혈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온전치 않은 컨디션 탓에 벤치에서는 이들을 제대로 활용조차 하지 못했다.
이토록 헐거워진 마운드를 이끌고 숙적 일본과 대만, 호주가 버틴 조별리그를 통과해 8강 무대를 밟은 것 자체가 이미 선수들이 만들어낸 훌륭한 기적이었다.

마이애미에서 마주한 세계의 벽은 상상 이상으로 높고 단단했다. 최근 들려온 소식은 세계 야구의 지형도가 얼마나 무섭게 요동치고 있는지 증명한다.
'영원한 우승 후보' 일본마저 베네수엘라에 5-8로 일격을 당하며 사상 처음으로 WBC 8강에서 짐을 쌌다. 메이저리거들이 주축이 된 중남미 국가들의 약진이 그만큼 엄청나다는 의미다. 하물며 한국이 상대한 도미니카공화국은 그 베네수엘라조차 예선에서 꺾고 전승으로 올라온 팀이다.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 크리스토페르 산체스 등 미국 대표팀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지구방위대급'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었다.
0-10이라는 콜드게임 스코어가 뼈아플 뿐, 17년 만에 8강에 올라 이런 경이적인 팀과 맞붙은 결과 자체를 아쉬움을 넘어 참사나 실패로까지 단정지을 수 없는 이유다.


도미니카공화국의 선발 산체스는 156km의 강속구에 싱커와 체인지업까지 정상급 구위를 가동했고, 이어 나온 아브레이유는 158km의 포심을 꽂아 넣으며 세계 야구를 지배하는 '구속 혁명'의 현실을 뼈저리게 확인시켜 주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추격의 흐름을 끊어버린 주심의 야속한 오심과 대만 일부 팬들의 악플 테러까지 겹치며 선수들은 참으로 외로운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악조건 속에서도 태극전사들은 품격을 잃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18년 동안 묵묵히 조국의 마운드를 지탱해 온 영원한 에이스 류현진이 있었다.
1조 원 타선에 맞서 40구를 던지고 마운드를 내려온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야수들이 적응할 시간을 벌어줬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며 숭고한 자책으로 한국 야구의 한 시대를 아름답게 닫아냈다.


대투수가 비워낸 마운드와 타석 위로는 새로운 세대들의 희망이 피어났다. 고우석은 세계 최강 타자 3명을 단 12구 만에 잠재웠고, 24살 강심장 조병현 역시 10구 삼자범퇴로 차세대 수호신의 탄생을 알렸다. 대만전 홈런과 호주전 9회초 천금 같은 볼넷으로 혈을 뚫은 1번 김도영, 156km 산체스를 상대로 유일한 2루타를 때려낸 4번 안현민은 완벽한 신무기로 자리 잡았다. 1라운드 11타점으로 대한민국 신기록을 쓸어 담은 문보경은 한국 야구의 찬란한 세대교체를 증명했다.
물론 뼈를 깎는 쇄신과 반성은 한국 야구에 남겨진 무거운 과제다. 아쉬움도 많다.
그러나 최악의 전력 누수 속에서도 온몸을 던져 17년 만의 뜨거운 봄날을 선물해 준 선수들의 땀방울마저 콜드게임이라는 결과로 부정당할 수는 없다. 단지 지금 우리의 현주소가 세계 정상의 높이에 아직은 조금 부족했을 뿐이다.
그러니 무거운 짐을 안고 돌아오는 태극전사들이 고개 숙일 필요는 없다.
상처투성이가 되면서도 마지막 아웃카운트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준 그들을 향해 지금 당장 우리가 보내야 할 것은 "왜 그것밖에 못했느냐"는 날 선 질책이 아니라,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다"는 진심 어린 위로와 따뜻한 위로의 박수가 아닐까.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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