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쉰 번째 헌혈을 앞두고

내가 처음 헌혈을 한 것은 1993년 고등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 거창한 의미를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함께 잠시 수업을 빠질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그 작은 호기심으로 시작한 헌혈이 어느덧 쉰 번째를 앞두고 있다.
사실 처음부터 헌혈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헌혈을 하면 몸에 좋지 않다며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는 어머니 몰래 헌혈을 하기도 했다. 결혼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소 빈혈이 있어 헌혈 수치가 잘 나오지 않는 날도 많았고, 남편 역시 몸을 걱정하며 헌혈을 말리곤 했다.
그래서 나에게 헌혈은 늘 조금은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무작정 헌혈의 집으로 가기보다는 먼저 확인부터 했다. 보건소에서 근무하다 보니 헌혈을 하러 가기 전 검사실에서 헤모글로빈 수치를 확인하곤 했다. 헌혈이 가능한 수치가 나오면 그제야 안심하고 헌혈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이어온 헌혈이 마흔 번을 넘기고 이제 쉰 번째를 바라보고 있다.
헌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건강해야 가능한 나눔이다. 일정한 체중과 혈압, 그리고 헤모글로빈 수치 등 여러 조건을 충족해야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헌혈을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와 함께 스스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는 작은 증거이기도 하다.
혈액은 아직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고 장기간 보관도 어렵다. 수혈이 필요한 환자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건강한 사람의 헌혈뿐이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헌혈 참여율은 인구 대비 약 5.6% 수준이라고 한다. 즉 100명 중 5명 정도만이 헌혈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다. 또한 혈액은 유효기간이 짧아 적혈구는 약 35일, 혈소판은 5일 정도밖에 보관할 수 없다고 한다. 안정적인 혈액 수급을 위해 꾸준한 헌혈 참여가 필요한 이유다.
헌혈하고 난 뒤 나의 일상은 특별히 달라지지 않는다. 평소처럼 일하고 평소처럼 생활한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내 혈액이 필요한 환자에게 전달돼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느꼈다.
매년 6월 14일은 '세계 헌혈자의 날'이다. ABO 혈액형을 발견한 오스트리아 과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박사의 생일을 기념해 제정된 날로, 헌혈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헌혈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 헌혈을 꾸준히 이어온 사람에게는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날이기도 하다.
이제 곧 쉰 번째 헌혈을 하게 된다. 숫자로 보면 하나의 기록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지난 시간 동안 이어온 작은 실천의 흔적이다. 어머니 몰래 시작했던 헌혈이 어느덧 쉰 번째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나눔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 그것이 헌혈이 가진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눌 수 있는 형편이 되는 한 이 작은 실천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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