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온기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고향이다

이영숙 시인 2026. 3. 15.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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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이영숙 시인

"아, 진짜 집에 왔네."

양손 가득 선물 꾸러미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아들딸의 모습에서 설레는 '귀향'을 읽는다. 집 만두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앉은 자리에서 두 접시를 비우고 두 시간 남짓 정겨운 근황을 풀어놓은 뒤에야 각자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나도 조용히 책방으로 들어와 전광식의 『고향』을 다시 꺼내 들었다. '고향은 우리를 현실로부터 납치한다.'라는 밑줄 친 문장이 보인다. 오디세우스의 귀향이든 플라톤의 귀향이든 모든 철학의 끝도 귀향이다. 그것이 물리적인 공간이든, 정서적인 기억이든, 형이상학적 본질이든 결국 귀향은 모든 순례의 종점이다.

고향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넘는다. 생물학적인 주소지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이 안식할 수 있는 실존적 토대다. 하이데거는 현대인은 고향을 잃어버린 '고향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진단했다. 고향은 실존적 고향을 회복하는 성소(聖所)이다.

고향에선 굳이 무언가를 증명하거나 성과를 내보일 필요가 없다. 단단히 옥죈 셔츠를 풀고 날 것의 상태로 햇볕을 쬐며 무장해제 하는 곳이고 밥상에 둘러앉아 수저 부딪치는 정적만으로도 아늑한 평온을 느끼는 곳이다. 즉 타향에서의 숨 가쁜 질주를 멈추고 본래의 자기를 다듬는 공간이다.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지름길을 찾도록 인도하는 가장 밝은 등대이며 북극성이다.

누구라도 고향 집 식탁에 앉는 순간, 팽팽한 긴장의 끈은 맥없이 풀린다. 타향에서 느꼈던 근원적 불안은 사라지고 "이제 더 이상 나를 방어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무언의 안도감이 든다. 세상의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가장 견고한 품은 콘크리트 벽이 아니라 자식의 허물까지도 온전히 품어주는 어머니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제일 먼저 부르고 / 가장 나중까지 남는 이름 / 무수히 밟히고 지나가고 잊히는 / 살 속 뼛속 골수에 박혀 / 나를 따라오는 / 내가 따라가는 / 나의 그림자 같은 이름 / 어머니// 
(홍윤숙, 「어머니」 전문)

나도 한때 어머니라는 따뜻한 성소에서 삶의 동력을 얻었듯, 이제는 아들딸이 제일 먼저 부르고 가장 나중까지 남을 이름, 그들의 그림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온기가 흐르는 곳이면 어디든 집이고 고향이다. 그곳의 온기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내일을 살아갈 가장 나다운 힘을 얻고 다시 '나'로 회복할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그 사람을 위해 내 마음속에 방 한 칸을 내어주는 일이고 그 사람의 고향이 되는 일이다.

고향은 삶의 동력을 일으키는 큰 油田이다. 오래전 방영한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골목은 매일 온기를 뿜는 거대한 유전이었다. 그 골목이 그토록 그리운 것은 밥상머리에서 나누던 그 작고 평범한 이야기,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는 니체의 책처럼 가난이라는 틈새로 수시로 스며들던 온기 때문이다.

때로는 풍요가 만든 벽보다 가난이 남긴 작은 틈새가 더 따스하다.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부자로 살아간 이들, 몽글몽글 피어난 그 훈훈하고 순수했던 이야기, 온기로 운행된 쌍문동의 따뜻한 골목 이야기는 고향을 떠나 사는 이들의 깊은 향수였고 우물이었다.

결국 생물학적인 고향이든 영혼의 고향이든, 고향은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본래의 자기로 회귀하는 안온한 공간이다. 누군가에게 내어준 마음 한 칸, 그곳도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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