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초격차 벌린 中, 내수까지 잡는다면 [정다은 특파원의 딩동 베이징]
기술 초격차 이뤘지만 과잉경쟁으로 시장왜곡
이제 마지막 퍼즐인 경제 체질 개선까지 돌입
더 무서워진 中의 백년대계, 한국도 직시해야

최근 방문한 중국 최북단 헤이룽장성 헤이허의 HL만도 동계 테스트장은 영하 30도 혹한을 뚫고 달리는 중국 전기차들로 분주했다. 처음 들어본 중소형 브랜드마저 눈밭 위에서도 흔들림 없는 승차감을 뽐냈다. 더 인상적인 것은 개발 속도였다. 글로벌 완성차 고객사들이 신차 개발에 최소 24개월을 들이는 데 비해 중국 고객사들은 14~18개월이면 새 모델을 내놓는다고 회사 관계자는 귀띔했다. 일정이 워낙 타이트하다 보니 춘제 연휴를 반납하고 일하는 엔지니어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춘제 때 보통 2주, 최대 한 달까지 쉬는 중국인들의 풍습을 생각하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광경이다.
비슷한 시기 취재 현장에서 우연히 친해진 한 대학생 인턴기자와 주말에 도심 나들이를 갔다. 대학을 다니는 저장성에서 하도 인턴을 구할 수가 없어서 베이징까지 올라왔다는 그는 하루 50위안(약 1만 원)을 받고 일하지만 출근만 있을 뿐 퇴근 시간은 따로 없다고 했다. 오후 6시가 다 돼가는 시간에 길거리에서 함께 중국의 떡볶이 격인 ‘카오렁미엔’을 먹고 있을 때도 휴대폰은 끊임없이 울렸다. 결국 음식을 반도 먹지 못한 채 사무실로 향한 그는 “그래도 무급 인턴보다는 낫다”고 했다.
지금 중국에는 이런 ‘두 개의 과로(過勞)’가 공존한다. 하나는 전기차와 인공지능(AI) 같은 첨단산업 현장에서 벌어지는 과로다. 기술 경쟁의 최전선에 있다는 자부심 속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목도하고 있다”고 말하는 종사자들이 적지 않다. 다른 하나는 청년들이 생존을 위해 감내하는 과로다. 한국 사회는 이 두 장면을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소비한다. 전자는 중국의 무서운 성장 속도를 강조하며 ‘워라밸’을 중시하는 청년 세대를 훈계할 때, 후자는 그럼에도 중국 경제는 위기에 몰렸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때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두 과로의 뿌리는 사실 같다. 바로 중국 사회에 만연한 ‘네이쥐안(内卷·제 살 깎아먹기 경쟁)’이다. 그리고 이 네이쥐안의 배경에는 판을 뒤집어서라도 선두를 차지하겠다는 중국의 독한 산업 전략이 자리 잡고 있다. 10여 년 전 중국 지도부는 내연기관 자동차로는 서양과 일본을 따라잡기 어렵다 판단하고 대신 전기차 개발로 핸들을 꺾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이를 ‘환도초차’, 즉 차선을 바꿔 경쟁자를 추월하는 전략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후에도 중국은 ‘신질생산력’ 등으로 이름만 바꿔가며 신기술에 파격 투자를 이어왔다. 미국의 첨단 반도체 규제 속에서도 압도적 가성비의 AI 모델 ‘딥시크’를 내놓으며 세상을 충격에 빠뜨릴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전략 덕분이다.
성과는 분명하다. 전기차는 말할 것도 없고 사실상 반도체를 제외한 대부분 과학기술에서 중국은 한국을 앞지른 상태다. 하지만 이 같은 과정에서 국가가 특정 산업에만 정책 지원과 보조금을 몰아주면서 과잉생산과 저가 출혈경쟁이 반복됐다. 동시에 경제의 버팀목이던 부동산이 무너지면서 청년들은 ‘열정페이’에라도 감사해야 하는 극심한 취업난에 직면하게 됐다.
주목할 점은 중국이 이제 이 구조적 모순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중국은 15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하는 상징적인 해임에도 불구하고 올해 양회에서 경제성장률 목표를 5%에서 4.5%로 내렸다. 대신 역대 최고 수준의 재정적자율(4%) 목표를 설정해 소비 부양 의지를 강력히 드러냈고 보육·양로 인프라 등 민생 분야 목표도 크게 늘렸다. 그러면서도 과학기술 연구개발(R&D) 예산은 지난해 대비 10% 늘렸다. 첨단산업 투자는 이어가되 소비와 사회안전망을 강화해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지난 10년간 집요한 차선 추월 전략으로 기술 초격차를 벌렸다면 이제는 우위를 굳히기 위해 고속도로 인프라까지 대대적으로 정비하며 ‘체질 개선’이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기술력에 탄탄한 소비력까지 갖추게 되면 중국은 지금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될 테다. 물론 실현 가능성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어온 중국의 행보를 떠올리면 안 된다고 단정하기도 쉽지 않다. 그들이 처한 모순만큼이나 그 모순을 해결해나가는 집요함을 직시하고 우리의 대응 전략을 마련할 때다.
베이징=정다은 특파원 downrigh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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