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토론 공간 '공론장' 첫 정립…獨 현대철학 거장 하버마스 별세

최한종 2026. 3. 1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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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된 '행동하는 지성'…향년 96세
'공론장의…' 논문으로 이름 알려
"합리적 대화가 사회유지 원동력"
선천성 구개열로 평생 장애 겪어
인간의 의사소통 문제에 천착


공론장(public sphere)과 의사소통 행위 이론 등으로 유명한 ‘유럽의 지성’ 위르겐 하버마스(사진)가 14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96세.

독일 출판사 수어캄프는 하버마스가 독일 바이에른주 슈타른베르크에서 이날 눈을 감았다고 발표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현대철학자로 추앙받았던 하버마스는 1929년 독일 뒤셀도르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9년 괴팅겐대에서 철학을 배운 뒤 취리히대와 본대 등에서 철학·심리학·독일문학·경제학을 두루 공부했으며 언론인으로도 활동했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 합류한 하버마스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공론장의 구조변동’(1961) 논문이다. 하버마스가 말한 공론장은 시민들이 공적 문제를 이성적으로 토론하며 여론을 형성하는 사회적 공간으로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한 발판이었다. 하버마스는 유럽 부르주아 살롱 문화에 뿌리를 둔 공론장이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며 공공 문제를 논의하는 공간으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20세기 들어 대중매체가 힘을 얻고 상업 문화가 확산하면서 공론장의 성격이 변질됐다는 점까지 짚어냈다.

그가 1981년 발표한 ‘의사소통 행위 이론’은 현대 철학의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꼽힌다. 하버마스는 이 책에서 인간 사회는 정치적 또는 경제적 힘이 아니라 합리적인 대화 능력에 의해 유지된다고 강조했다. 그의 주장은 나치 체제 붕괴 이후 처음으로 자유로운 정치 토론 문화를 경험하던 서독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버마스는 선천성 구개열로 다섯살 때까지 두 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았으며 말을 또렷하게 전달하기 어려운 장애를 겪었다. 그가 인간의 의사소통 문제를 깊이 탐구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언급된다. 하버마스는 2004년 도쿄 강연을 통해 어렸을 때 학교에서 친구들과 완벽하게 교류하기 어렸다는 점을 이야기하며 의사 소통을 설명하기도 했다.

하버마스는 ‘행동하는 지성’으로도 유명했다. 1980년대 독일 사회 일각에서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학살)’를 당시 사회상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주장이 흘러나오자 이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며 과거의 역사적 책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저작과 발언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반의 정치 논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민주주의의 초국가적 확장을 강조하며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입장을 꾸준히 밝혀왔다.

하버마스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와는 구별되는 비판이론 전통 속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사상가로 꼽힌다. 1960년대 후반 유럽 전역에서 확산한 학생운동에도 공감과 지지를 보냈다. 다만 과격한 행동이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이른바 ‘좌파 파시즘’의 위험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군사적 대응에는 신중해야 하며 러시아와의 협상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젊은 지식인들과 우크라이나 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하버마스는 1990년대 국내 학계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민주화 이후 토론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이 배경이 됐다. 당시 국내에서만 175편이 넘는 관련 논문이 발표됐고 논의에 참여한 학자도 70여 명에 달했다. 1996년 4월 그의 방한은 이러한 관심의 정점을 보여줬다. 하버마스가 약 2주간 한국에 머무는 동안 강연장과 학술 행사마다 수천 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그는 자신의 지도 아래 박사 학위를 받은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교수가 2003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자 서울중앙지법에 석방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기술과 인간, 기술과 사회의 관계가 급격히 변하는 시대에 하버마스의 인간학과 사회이론은 여전히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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