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과 목욕탕 [정문정의 대화의 발견]

한겨레 2026. 3. 15.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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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정문정 | 작가·‘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저자

시작은 경북 울진에 있는 온천이었다. 2년 전, 울진 도서관에서 강의 요청이 왔다. 나는 도서관에 각별한 충성심이 있다. 아침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하던 시절, 언제든 주눅 들지 않는 곳은 도서관뿐이었다. 그걸 안 사면 큰일 나는지를 따지는 게 소비의 주요 기준이었을 때도 유일하게 고상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돈이 아깝다” “시간이 아깝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도 정작 주어에 ‘나’는 없어서 시작한 건 꾸역꾸역하는 게 습관이던 때에, 마음껏 중단해보는 경험도 거기서만 가능했었다. 읽던 책을 덮고 스스럼없이 다른 책을 집어 드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내 독서 취향을 알게 되었다. 스타일이란 숱한 낭비와 실패의 결과물이니까. 도서관에서 받은 환대로 세상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도서관이 성당이고 절이다.

도서관에서 부르면 일단 알겠다고 하고 경로를 찾아보는 편인데 그날도 그랬다. 어디 보자. 울진이 어디에 있나. 아니 잠깐만. 서울에서 울진까지는 차로 네 시간이다. 서울에서만 먼 게 아니었다. 경북 안에서도 최북단이고 위로는 강원도 삼척이 맞닿아 있다. 이렇게 된 거 2박3일로 여행을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찾아보니 덕구 온천이 유명하다고 했다. 온천이라. 딱히 끌리지 않았지만 간 김에 한번 정도 경험하는 건 괜찮겠다 싶었다. 평소에 잘 안 하는 짓도 낯선 곳에서는 시도하는 게 여행의 묘미니까 일단은 가보기로.

첫날 저녁 간단히 목욕을 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날 화장을 하는데 피부가 반들거렸다. 역시 물이 다르구나. 강의를 끝낸 뒤 또 덕구 온천에 갔다. 이번에는 노천탕도 실컷 이용하며 세시간을 놀았다. 숙소에 들어가서 침대에 눕자 몸이 말랑거리는 것 같았다. 오래 전 교통사고로 골절되어 수술했던 발목을 살며시 움직여보았는데 삐걱대는 소리가 덜 났다. 다음날에는 종일 덕구 온천에만 있었다. 삼일 동안 세번 덕구 온천에 갔고 밤마다 노곤해져서 술 없이 열시 전에 잤다. 깊은 단잠이었다.

그 후로 호시탐탐 목욕탕에 간다. 지역 도서관에 갈 일이 있으면 근처 온천부터 찾아본다. 최근에는 온양 온천에 들렀다가 왜 조선 왕들이 여기서 휴양을 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시대를 잘 타고나서 만원 조금 넘는 돈으로 내가 왕의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고양시에 있는 온천에도 입장권을 스무장 사놓았다. 목욕탕에 가는 걸 빼먹은 주는 영 허전하고 아쉽다.

월요일 아침 작업실 동료 김과 함께 커피를 사러 갔다. 주말에 뭘 했느냐고 물어보기에 서울 근교 온천에 다녀왔다고 했다. 김이 반색하면서 자기도 요즘 갑자기 목욕탕에 가는 게 너무 좋아졌다며 나이 든 증거 같다고 했다. 갑자기 떠오른 문장이 있어 말해주었다.

“그럴 수도요.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에 그런 표현이 나오잖아요. ‘나이를 먹으면 이발소와 목욕탕을 좋아하게 된다.’ 언니는 미용실도 좋아하게 됐어요? 전 미용실은 아직.”

“앗. 저 어제도 미용실 다녀왔어요. 하루키….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없나.”

그렇게 시시덕거리고 있으니 시킨 커피가 나와서 종이컵을 각자 손에 받아 들었다. 할 일이 많아 마음이 급했다. 커피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작업실로 향하는데 김이 말했다.

“우리는 나이 들어 그렇다 치는데, 요즘 젠지 세대에서는 왜 유행할까요? 얼마 전에 그런 기사를 봤어요. 사우나가 요즘 핫하대요.”

“그래요? 졸지에 우리 트렌디한 사람 됐다.”

웃고 나서 내가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새 못 읽은 메일과 카톡 알람이 와있었다.

“아. 그래서 그렇네요. 휴대폰을 못 써요.”

“네?”

“휴대폰을 못 들고 가는 데가 목욕탕밖에 없어요. 강제로 디지털 디톡스가 돼요. 생각해보니까 나이랑 상관없이 목욕탕이 그래서 더 인기인가 봐요. 가만히 멍 때릴 수 있으니까.”

“맞아.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요즘은 젤 어려워요.”

목욕탕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목욕만 한다. 동시에 여러가지를 할 수가 없다. 물의 온도에 집중하고 몸의 변화를 관찰하다 보면 집중과 몰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면 잠깐이라도 명상하듯 백지상태에 머무르는 순간이 선물처럼 찾아오기도 한다.

또 어김없이 목욕탕에 간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손을 흔든다. 이럴 때는 딸이 없어 홀가분하다는 정신승리를 해본다. 발그스름해진 얼굴로 국수를 먹고 아이와 도서관에 들렀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 지금 바빠야 나중에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불안은 이런 하루를 보낸 직후에는 한동안 픽 사그라진다. 단순하고 평범하게 보냈지만 좋았다. 아니 그래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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