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탐구생활] 연구에만 전념하도록… 정부 과학기술 정책 판이 바뀐다

이한빛 기자 2026. 3. 1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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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에 35.3조 투입… 기술주도 이끈다
기초연구 저변 확대·AI 접목 K-문샷 추진
경쟁 통해 예산 확보하던 PBS 제도 폐지
대규모 연구 예타 없애고 사전 검토 전환
전문가 “실패 학습 부족… 도전 연구 필요”
챗GPT를 통해 생성한 이미지

정부가 주도하는 국가 연구개발(R&D)사업이 새판 짜기에 나섰다. 올해 역대 최대 규모의 예산을 편성한데 이어 예비타당성 조사도 폐지되면서 예산 심사·편성 체계도 바뀌게 됐다.

아울러 연구 문화도 성과 중심이 아닌 실패와 도전을 중시하는 기조가 확산되면서 앞으로 다양한 형태의 연구개발(R&D) 사업이 시도·운영될 것으로 기대된다.

◇역대 최대 R&D 예산 바탕 기초연구 복원·AI 접목 등 추진
올해 정부 R&D 예산은 총 35조3000억원 규모로 지난해(29조6000억원) 보다 5조9000억원이 증액되면서 역대 최대 규모가 편성됐다. 윤석열 정부에서 25조9000억원까지 떨어졌던 것을 고려하면 정부의 과학기술 지원 기조가 예산 확대로 이어진 셈이다.

정부 R&D 사업은 올해 총 33개 부·처·청에서 추진하며 이재명 정부의 주요 과제인 ‘기술주도 성장’과 ‘모두의 성장’에 맞춰 생산성 향상과 지속가능한 성장 기반 마련을 목표로 한다.

정부는 해당 예산을 미래 성장 동력이자 국가 전략기술로 꼽히는 인공지능(AI)·반도체·양자·첨단바이오 등의 분야와 기초연구 확대, 인재양성, 지역 균형 발전 등에 투입해 연구 생태계 강화를 꾀한다는 계획이다.

박인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2026년 정부R&D사업 부처합동 설명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과기정통부 제공

특히 기초연구 복원과 육성을 통해 성과를 낼 수 있는 생태계 도약을 목표로 작년 12월 ‘기초연구 생태계 육성 방안’을 수립했다.

육성 방안에 따르면 기초연구의 저변을 확대해 생애 첫 수행, 경력단절, 지방 연구자 등을 우대하고 긴 호흡의 연구를 위한 연구기간 연장과 후속연구 연계도 지원한다.

정부는 기초연구 사업이 전체 어느 정도 비율인지를 보여주는 ‘수혜율’을 중심으로 관리해 오는 2030년까지 전체 교육 수혜율 30%를 확보하고 R&D 투자의 일정 비율이 기초연구에 배치되도록 법 개정도 나설 방침이다.

또 청년 연구자들이 성장경로에 맞춰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성장 사다리를 촘촘하게 구축하고 대학·지방 등 기초연구기관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육성한다.

기초연구 생태계에서 민간의 역할을 높이기 위한 협의체 구성과 투자를 촉진하고, 연구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평가 과정 개선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연구자들이 과학기술에 AI를 접목해 과학적 난제와 파급력이 큰 국가 미션을 해결하는 이른바 K-문샷 추진전략도 수립하고 12개 미션을 선정했다.

◇PBS 제도·예타 심사 폐지로 시의성 있고 유연한 연구과제 운영 유도
연구자들이 연구와 기술개발에 온전히 집중하고 R&D 사업이 시의성 있게 추진될 수 있도록 연구 공모과정의 개편에도 나섰다.

정부출연연구원(출연연)을 대상으로 진행하던 연구과제중심제도(PBS)는 오는 2030년까지 단계적인 폐지 절차에 들어간다.

PBS는 출연연이 운영비와 인건비 확보를 위해 외부 연구 과제를 수주하도록 경쟁을 촉진하는 제도로 그동안 연구책임자가 스스로 연구 과제를 섭외하거나 수주경쟁에 참여해야 했다.

PBS 제도는 일원화된 인력 관리와 인력규모 관리에 대한 자율성을 확대하는 등 효율성을 높였고, 연구 사업의 인건비를 사업과 연계해 지급해 수립부터 집행까지 투명하게 관리가 이뤄지도록 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경쟁적인 수주로 인해 기관 운영예산 확보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고 장기적 안정성을 해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연구자가 연구에 몰두하지 못하고 수주에 집중해야 하면서 연구역량이 분산되는 문제도 초래했다.

인건비·간접비 산정과 관리 합리성 부족, 연구비 집행 권한 부족, 잔여예산 정산문제, R&D사업비에 대한 회계원칙 부재 등도 지적됐다.

지난해 8월 열린 국정기획위원회 국민보고대회 모습. 연합뉴스

이에 정부는 지난해 8월 국정기획위원회에서 PBS 제도의 폐지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출연연이 성과창출형 거점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국가전략기술 중심 임무수행체계를 확립해 기술 확보와 난제 해결, 기업·지역역량 제고 등을 수행하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수주를 통해 확보하던 연구비와 인건비는 기관출연금으로 전액 지원하며, 출연연 주도로 기획하는 전략연구사업을 신설한다.

출연연에 대한 기관평가도 계획 대비 달성도 중심에서 대표성과 위주로 전환해 부담을 줄인다. 이를 반영해 성과급과 우수연구진 상여금을 신설하는 등 처우개선을 확대한다. 연구행정 전문화로 행정 부담을 최소화하도록 관련법도 개정한다.

아울러 지난 1월 국가재정법 개정에 따라 대규모 예산이 소요되는 국가R&D 사업이 예비타당성조사에서 제외됐다.

정부는 대규모 국가재정이 투자되는 경우 사전타당성과 경제성 검증을 위해 예타 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R&D 분야는 2008년부터 대상에 포함됐는데 기획부터 통과까지 평균 3년이 소요됨에 따라 빠른 기술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연구의 신속한 추진을 방해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져왔다.

양자 기술의 경우 기술 태동기인 2016년부터 예타에 도전했지만, 경제성 부족 등의 사유로 대규모 투자가 지연되면서 선도국인 미국 대비 6년 이상 기술격차가 벌어진 바 있다.

이번 법 개정에 따라 500억원 이상의 R&D사업은 예타 대상에서 제외됐다. 대신 신규 사업의 기획부실화를 방지하고 투자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1000억원 이상 사업을 대상으로 사전점검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신규 사업의 부실한 추진을 방지하도록 11월부터 3월까지 사업계획서를 미리 검토하는 절차도 수립했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정통부 장관이 11일 열린 제5회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과기정통부 제공

정부는 후속 제도로 연구시설·장비 구축 등을 중심으로 하는 구축형 R&D 사업을 적용할 예정인데 체계적인 사업관리가 필요한 만큼 추진 타당성과 실현 가능성, 계획변경 적정성을 살피기 위한 추진 심사와 계획변경 심사 등을 도입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같은 전주기 심사로 단계별 관리를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예타 폐지에 따라 기술 주도권 확보를 위한 전략적 투자 결정이 시의성을 갖고 이뤄지고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R&D를 통한 기술 선점의 골든타임도 확보할 것으로 기대된다.

◇성공 여부보다 도전적 연구 문화 우선… 실패 자산화 목소리도
R&D 사업 추진의 신속성·유연성을 위한 개선과 더불어 연구문화에 대한 인식 변화도 이뤄지고 있다. 그동안 성공, 성과에만 안주하던 사업에서 탈피해 실패 위험이 커도 큰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도전적 연구가 중시되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과학기술 연구에서 성공 못지않게 중요한 실패에 대한 관리와 학습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을 지낸 염한웅 포스텍 교수는 지난 1월 열린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R&D 실패란 무엇인가: 정의·책임·미래 설계’ 토론회에서 “과학기술 발전은 수많은 실패를 통해 이뤄진다”며 “성공적인 것 하나를 끌어내기 위해 수많은 실패를 반복해서 끌어내는데 제도적으로는 성공한 결과만 축적돼서 실패한 결과가 자산화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과기정통부가 지난해 8월 개최한 R&D 생태계 혁신을 위한 연구현장 간담회 모습. 과기정통부

이정동 서울대 교수도 “실패의 가치는 연구 과정의 성실함을 넘어, 설정한 목표가 얼마나 위험하고 도전적이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며 “R&D 실패를 제도적으로 용인하고 자산화하기 위해서는 ‘기존 상식을 뒤집고자 하는 도전적 질문을 던졌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에 과기정통부는 연구자들이 어려운 목표에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한계 도전 연구과제 활성화에 나섰다. 기존 R&D 사업이 의사결정을 통해 결정됐다면 해당 과제는 과제관리책임자(책임 PM)에게 전 과정을 자율적으로 운영할 권한과 책임을 부여해 도전적 개발이 이뤄지도록 하는 방식이다.

책임PM 사업은 △바이오 △소재 △기후·에너지, 관련 응용·융합과 기타 분야 등 5개 분야에서 선발하며 신규 연구 주제와 과제 기획, 과제관리와 성과 확산, 한계 도전 연구 개발 체계 고도화 등의 임무를 부여할 계획이다.

정부는 아울러 연구자들이 마음껏 연구에 도전하도록 실패한 연구의 자산화를 위한 후속 지원을 검토하고 핵심 인재들이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국내에 안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안정적이고 도전적 연구 환경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한빛 기자 hble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