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 가해자 앞에 다시 선 피해자, 그가 건넨 '두 개의 선택지'

2026. 3. 15.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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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성의 공연한 오후]
2인극 '말벌'(THE WASP)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연극 '말벌'. 해븐프로덕션 제공

임신한 배를 드러낸 채 카페 야외 테이블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카알라(권유리).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헤더(이경미)는 주눅 들고 긴장한 티가 역력하다. 둘은 고등학교 동창이지만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불량한 모습의 카알라와 깔끔한 정장에 고급 가방을 들고 나타난 헤더의 상황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헤더는 학창 시절 폭력 가해자였던 카알라에게 연락을 했고, 만나서는 대뜸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며 은밀한 부부생활을 털어놓는다. 어린 나이에 결혼해 이미 네 명의 자녀가 있고 다섯째를 임신 중인 카알라는 "이 아이 너 줄까?"라며 영아 매매를 제안하더니, 아니면 대리모를 해줄 테니 얼마를 줄 수 있냐고 묻는다.

충격적인 한 편의 완결된 드라마 같지만 총 3막으로 구성된 연극 '말벌' 1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야기다. 이후 헤더와 카알라 사이의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영아 매매와 대리모 의뢰를 넘어 캣피싱(특정인을 대상으로 SNS에서 가짜 신분을 만들어 기만하는 행위), 살인 청부 등 자극적이면서 선정적인 이야기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이어진다. 일련의 사건의 원인이자 끝에는 치유되지 못한 헤더의 깊은 상처가 자리하고 있다.

추리소설 작가 제프리 디버의 말을 빌리자면 "미스터리가 독자와 주인공이 풀어나가는 퍼즐이라면, 스릴러는 독자와 주인공이 앞자리에 앉아 즐기는 롤러코스터"다. 2인극 스릴러인 '말벌'은 3막의 공연 내내 롤러코스터의 속도를 올리고 낙차를 높여 관객을 극도의 긴장 상태로 몰아간다. 매 장면마다 놀라운 반전과 충격적 사건이 이어지지만, 마지막 장에 이르면 모든 이야기와 인물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영국 극작가 모건 로이드 말콤의 치밀한 극작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두 개의 하얀 커튼막 사이로 무대가 세 공간으로 펼쳐진다. 헤더와 카알라가 만나는 1막 카페 장면은 무대 앞면만 사용한다. 첫 번째 커튼막을 제거한 2막에서는 무대 중간에 자리한 헤더의 거실에서 둘이 살인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3막 마지막 커튼이 제거되면 1막부터 겹쳐진 얇은 커튼막 사이로 흐리게 드러났던 낡은 화장실 공간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화장실은 헤더가 과거 심각한 심리적 상처를 입었던 장소로 그 사건 이후 평생 안고 살았던 헤더의 트라우마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극이 진행됨에 따라 커튼이 걷히면서 진실에 다가가는 구조로 무대를 설정했다.


유리, 거친 카알라 역을 위화감 없이 소화

연극 '말벌'. 해븐프로덕션 제공

학창 시절 학교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였던 카알라와 헤더의 재회는 사소한 대화 속에서도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과거의 상처를 직접 드러내지 않은 채 사건을 공모해 가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내밀한 심리가 복잡하게 얽히고, 극이 진행될수록 시시각각 뒤바뀌는 권력관계는 2인극이라는 형식을 통해 더욱 극대화된다.

헤더는 부유한 환경에서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불쑥불쑥 상처와 불안을 노출한다. 카알라는 거친 삶을 살아온 티가 역력한데도 현실을 낙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가 처한 현실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절망적이다. 헤더와 카알라가 가볍게 주고받는 말 이면에는 감추고 싶은 현실과, 드러내지 못하는 상처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대사가 머금은 의미가 매우 풍부한 작품이다. 게다가 한순간도 숨을 데가 없는 2인극이라는 구조는 배우의 엄청난 집중력과 연기력을 요구한다.

헤더 역에는 뮤지컬 배우 김려원, 영상물에 주로 출연했던 한지은, 연극배우 이경미가, 카알라 역에는 소녀시대 유리(권유리)와 뮤지컬 배우 정우연이 캐스팅됐다. 다양한 장점을 지닌 배우들의 조합은 작품이 지닌 매력을 극대화한다. 특히 권유리는 아이돌 출신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존 이미지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거칠고 폭력적인 성향의 카알라 역을 위화감 없이 소화해낸다.

제목 '말벌'은 독을 지닌 타란튤라 거미를 끔찍한 방식으로 잡아먹는 타란튤라 말벌에서 가져왔다. 타란튤라 말벌은 독거미를 독으로 제압하고 지배한다. 그러나 폭력으로 입은 상처는 폭력으로 치유될 수 없다. 폭력의 순환 고리를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이 상처는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헤더는 카알라에게 두 개의 선택지를 제시하며 그의 선택을 기다린다. 이들의 폭력과 상처의 고리는 과연 끊어질 수 있을까. 공연은 다음 달 2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이어진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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