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 ‘장기 금지’ 이후 흩어졌던 노인들, 낙원상가 ‘놀이터’에 다시 모였다
서울 넘어 경기·인천 입소문 타고 방문
하루 평균 60명 안팎 노인 다녀가

“예전처럼 술 취한 사람이 없으니 싸움도 없고, 난방도 잘되니 천국이예요. 장기도 마음 편히 두니 우리에게는 이게 복지에요.”
노모씨(76)는 서울 종로구가 탑골공원에 있던 장기판을 치우고 낙원상가 1층에 새롭게 조성한 어르신 전용 여가 공간 ‘탑골 어르신 문화 놀이터(이하 놀이터)’의 주 고객이다. 그는 탑골공원의 담벼락 장기판이 철거된 후 종묘 등지를 돌아다니다 이곳으로 왔다.
지난 13일에도 이곳에서 장기를 두던 노씨는 “늙은 걸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자유로워서 좋다”며 “집에 혼자 있으면 밥도 안 먹고 온종일 한마디도 안 하는데 여기 오면 웃고 말하면서 건강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낙원상가 1층 외부 공간에 마련한 놀이터가 노인들의 새로운 ‘장기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66㎡ 남짓한 실내 공간에는 장기알을 두는 경쾌한 소리와 훈수를 두는 왁자지껄한 목소리로 가득 찼다.
탑골 놀이터는 지난달 문을 열었다. 이제 운영 한 달 차가 됐지만 매일 오후가 되면 장기를 두거나 훈수를 두러 오는 노인들로 이곳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익선동 등 청년들이 많이 방문하는 소위 ‘핫플레이스’와도 동선이 겹치지 않아 오로지 노인들만의 문화 공간이 되고 있다.
종로구는 탑골공원의 쓰레기·음주·폭력 문제를 없애고 문화유산을 보호하겠다는 취지로 지난해 7월 담벼락 주변 장기판 이용을 전면 금지했다. 대신 인근 서울노인복지센터 분관에 장기·바둑실을 사용하도록 안내했다. 하지만 이곳은 서울시민만 이용할 수 있어 경기·인천 등지에서 오는 노인들은 출입이 제한됐다. 결국 구는 거주지와 관계없이 누구나 장기·바둑을 둘 수 있는 개방된 놀이터를 만들었다.
경기도 광명시에서 온 박모씨(72)는 “장기판이 철거되면서 흩어졌던 사람들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고 있다”며 “예전에도 탑골공원에서 술 먹고 싸우는 사람은 소수였다.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우리만의 암묵적인 질서가 있어서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놀이터에는 장기·바둑을 둘 수 있는 테이블 17개와 정수기, 공기청정기 등이 설치돼 있다. 이곳에서는 주류 반입은 금지다. 물만 마실 수 있다. 방문객의 평균 연령은 80대로 혹시 모를 안전사고에 대비해 관리 매니저도 상주한다.
탑골공원 장기판 이용 금지 이후 놀이터에서 다시 만난 노인들은 여전히 거리를 유지하며 “강선생” “김씨” 등으로 서로를 불렀다. 함께 장기를 두고, 훈수를 두지만 서로 예의를 갖춰 대하는 게 문화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구청의 안내 현수막과 유튜브 방송 등을 보고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경기도 수원에서 온 김모씨(80)는 “재미 삼아 훈수 두러 오는 사람들도 많은데 공간이 조금 더 넓었으면 좋겠다”며 “장기를 두다가 쉬고 싶을때 신문이나 책도 볼 수 있는 장소가 옆에 생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종로구에 따르면 놀이터 개관 후 11일 기준 누적 이용 인원은 1936명으로, 하루 평균 60명 가량이 찾았다. 그 중 서울시민 이용 비율은 83%다. 구청은 이번 달부터 정기휴무일이던 월요일에도 문을 열기로 했다. 단 국가 공휴일에는 운영하지 않는다.
구청 관계자는 “놀이터가 서울을 넘어 수도권 어르신들에게도 의미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만큼 탑골 일대에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은성 기자 k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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