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 뒤 시네마’는 영화 속 경제 이야기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에서 이름을 빌려 왔습니다. 매일경제 뒤에 있는 영화관에서 담소 나누듯 경제 뉴스를 무겁지 않게 다뤄봅니다.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E.T.’(1982)는 외계인과 소년의 우정을 담아 세계인에게 사랑받았다. 직접 감상하지 않은 사람도 이티가 손가락을 내밀어 교감하는 모습이나 자전거를 타고 하늘로 떠오르는 장면을 알 정도로 대중 인지도가 높다. 재개봉을 포함해서 전 세계 극장 티켓 수입으로만 9900억 원을 벌어들였는데 이는 제작비의 6배에 달한다.
“난 항상 여기 있을 거야” [IMDb]
영화에서 경제 이야기를 읽어내는 ‘매경 뒤 시네마’에서 오늘 ‘이티’를 선정한 건 지난 14일이 화이트데이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탕을 건네는 화이트데이는 경제적 파급 효과가 큰 이벤트. 근데 화이트데이와 ‘이티’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이 영화에서 소년 엘리엇이 숲으로 숨어든 이티를 유인하기 위해 쓰는 수단이 바로 초콜릿 사탕이기 때문이다. 해당 초코캔디를 PPL(간접광고)로 제공한 허쉬는 톡톡한 판매량 증대 효과를 누렸다.
‘이티’의 명장면을 중심으로 화이트데이의 변천사와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한 상품 출시 등 경제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보자.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꾸민 이티. 영화에서 내내 강조되는 것은 이티의 무해함이다. [IMDb]
“징그러운 외계인이 우리 사탕 먹는다고? 반대일세”…마즈의 오판
영화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어느 숲속에 우주선이 내려앉으면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외계인의 방문엔 지구 침략 같은 음모가 숨어 있기 마련이지만 이들은 다르다. 지구의 식물을 채집하러 한밤중에 찾아온 것이다. 점잖은 식물학자 외계인들은 남의 별에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밤 중에 몰래 찾아왔을 것이다.
식물학자 외계인들은 조용히 식물만 채집해서 돌아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이를 내버려 둘 지구인이 아니다. [IMDb]
외계인이 조용히 식물을 가져가도록 내버려 둘 지구인들이 아니었다. 정부 요원들이 우주선 쪽으로 쫓아오는 바람에 외계인들은 허둥지둥 우주선에 올라탄다. 그러나 이들은 멤버 중 하나인 이티를 태우지 못했고, 지구에 홀로 남은 이티가 주인공 소년 엘리엇 앞에 나타난다. 지구인의 모습에 깜짝 놀란 이티는 숲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고, 엘리엇은 그와 친구가 되고 싶어 바닥에 초콜릿 사탕을 하나씩 떨어뜨린다. 이티가 그의 초대를 수락해 엘리엇의 집으로 들어오는 게 초반부 이야기다.
이 장면에 사용된 초코캔디가 바로 허쉬의 리세스 피시스다. ‘이티’가 세계적으로 흥행하면서 허쉬 리세스 피시스의 판매량도 급격히 늘었다. 개봉 이후 2주간 판매량이 직전 2주와 비교해 65%나 불었다. 그런데 원래 이 제안은 엠앤엠즈로 유명한 세계 1위 초콜릿 기업 마즈에 갔다고 한다. 마즈는 왜 이토록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일까.
마즈는 기괴한 외계인이 엠앤엠즈를 먹는 것이 브랜드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치리라고 봤다고 전해진다. 마즈는 여전히 글로벌 최고의 초콜릿 기업이지만, 미국인 마음에 ‘이티’의 초콜릿으로 각인될 기회는 놓쳤다. 이티에 대한 마즈와 허쉬의 상반된 접근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영학도들의 케이스스터디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기업들이 영화 PPL을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허쉬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100만달러 규모의 공동 마케팅 프로그램을 펼친다. 당시 광고 전단 모습 [온라인 커뮤니티]
‘이티’ 게임을 사막에 파묻은 회사
물론 ‘이티’와 함께 한 모든 기업이 웃은 것은 아니다. ‘이티’ 붐에 편승해 동명의 게임을 출시했다가 소비자 외면을 받은 게임사가 있다. 바로 당대 최고의 게임 회사 아타리다. 아타리가 내놓은 ‘이티’ 게임의 실패는 단일 기업의 몰락을 넘어 미국 게임산업 전체에 타격을 줬다.
아타리가 만든 ‘이티’ 게임 플레이 화면 [유튜브 캡처]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보기 전에 아타리의 역사부터 살펴보자. 아타리는 사실 세계 게임 역사를 바꾼 게임 체인저였다. 과거엔 신작 게임을 하려면 게임기 자체를 사야 했다. 게임기 자체에 2~3개의 게임이 탑재된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아타리는 게임팩 방식을 정착시켜 패러다임을 전환했다. 개별 가정에서 매번 게임기를 살 필요가 없어졌다. 게임 카트리지만 바꾸면 되는 경제적 방식에 북미 게임 시장이 급속도로 팽창한다. 북미 가정용 비디오 게임 시장 규모는 1978년 3억 달러에서 1982년 30억 달러로 커졌다.
아타리가 내놓은 게임기 ‘아타리 2600’. 카트리지로 게임을 하는 방식을 산업 표준으로 정착시켰다. [위키피디아]
그러나 성장세에 고무된 아타리는 오판한다. 게임 팬을 쉽게 본 것이다. 신상품만 내놓으면 집어 가는 존재들이라고 여겼다. 완성도 낮은 작품을 공장형으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아울러 시장 규모가 끝도 없이 커질 것이라고 봐 수요 예측에 실패했다. ‘이티’에 앞서 출시된 ‘팩맨’이 대표 사례다. 1200만 장이 팔릴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800만 장이 팔렸다. 400만 장이 재고로 남은 셈이다.
아타리는 최초의 가정용 ‘팩맨’을 출시했고, 최악의 ‘팩맨’을 내놨다는 평가를 받았다. [온라인 커뮤니티]
아타리가 ‘이티’의 게임 제작 라이선스를 획득하기 위해 당시 돈으로 2500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알려졌다. 지금으로서도 적은 돈이 아니지만 당시 물가 수준을 고려하면 거액의 베팅이었다. 그러나 거금을 들여놓고 게임 개발에는 단 5주만을 썼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출시해야 특수를 탈 수 있으리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성공을 예상하고 처음부터 400만 장을 찍었다.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았다. 260만 장이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임 완성도가 낮다는 평가가 소비자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고, 게임 잡지들도 혹평했다. 결국 66만 장이 반품되기에 이른다. 아타리는 몰랐다. 게임 팬은 ‘웬만하면’ 넘어가 주는 관대한 존재이지만, ‘웬만하지 않은 수준’을 봤을 때, 누구보다 무서운 안티로 돌아버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시 아타리와 게임사들이 찍어낸 저질 게임팩은 게임산업 자체에 대한 실망감으로 변했다. 1982년 연 매출 30억 달러에 달했던 북미 게임 시장이 1985년 1억 달러 수준으로 위축된다. 아타리가 당시 반품된 게임팩들을 사막에 파묻었다는 도시 괴담이 돌았고, 이는 2014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아타리: 게임 오버’를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시장이 아무리 급속도로 성장하더라도 기업은 늘 소비자 욕구를 먼저 충족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막에서 발굴한 아타리의 ‘이티’ 게임팩
재고처리를 위한 상술, 연인의 날로 40년을 생존
‘이티’의 사탕 장면과 함께 살펴보기 좋은 또 다른 경제 포인트는 바로 화이트데이다. 엘리엇이 이티를 유인하기 위해 숲에 초코캔디를 떨어뜨린 건 인간이 남에게 사탕을 건네는 이유를 보여준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사탕이 상대방의 꽁꽁 언 마음도 조금은 녹게 해 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화이트데이는 상업적 기획에서 출발했다. 1978년 일본 전국사탕과자공업협동조합은 매출을 늘리기 위해 화이트데이 위원회를 조직했다. 2년간 준비를 거쳐 1980년에 화이트데이가 시작됐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반으로 퍼졌다.
화이트데이를 맞이해 꾸려진 사탕 매대 [연합뉴스]
상술로 시작했지만 40년 넘게 사랑받은 건 주목할 만하다. 화이트데이는 ‘잘 만들어진’ 상술이었던 것이다. 그간 수많은 ‘데이’들이 사라지는 동안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는 기념일 양대 축으로 꿋꿋이 살아남은 것이다.
근래 들어 2, 3월의 양대 데이에는 뚜렷한 변화가 보인다. 일단 ‘의리 초콜릿’이나 ‘의리 사탕’이 사그라들고 있다. 친구나 직장 동료에게 우정의 의미로 건네는 의리 초콜릿과 의리 사탕은 양대 데이를 떠받치는 한 기둥이었다. 최근 일본 시장조사업체 인테이지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장 여성의 85%가 의리 초콜릿 문화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따라 초콜릿과 사탕이 모두 비싸진 데다가 직장에서 최소한의 인간관계만을 맺고 싶어 하는 개인주의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해석된다.
유통계는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이제 단순한 사탕만으로는 승부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각종 캐릭터와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티니핑이나 포켓몬, 텔레토비, 산리오 등 인기 캐릭터로 포장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다. 재밌는 점은 이런 상품의 상당수에서는 더 이상 사탕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데 있다. 키링, 가방, 큐션 같은 상품이 메인으로 들어가 있고, 그래도 화이트데이 상품이니 구색을 갖추기 위해 사탕이나 초콜릿을 몇 개 끼워 넣는 식이다.
실제 통계에 따르면 화이트데이를 맞아 파자마, 방향제, 전통차 등을 선물하는 연인이 늘고 있다. 사탕의 날에 사탕이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닌 셈이다. 이렇게 사탕 없는 화이트데이가 확산하다 보면 우리의 후손들은 화이트데이가 원래 사탕을 주고받는 날이었다는 걸 흥미로운 배경지식 정도로 소비할지도 모른다.
요즘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화이트데이 상품의 특징은 사탕 외 물건이 주인공이라는 데 있다. 사탕은 구색 갖추기 용으로 몇 개 들어가는 식이다. [세븐일레븐]
다른 존재를 인정하는 건 내 삶을 풍요롭게 한다
이토록 많은 경제 포인트를 지닌 ‘이티’에는 영화 자체로도 곱씹어 볼 메시지가 있다. 그건 다른 존재를 포용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영화에서 어른들은 이티를 지구에 끼어든 이물질 정도로 여겨 그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쫓아가고, 관찰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와 대조적으로 엘리엇은 다른 존재에 대한 순수한 관심으로 소통한다. 그건 이티를 돕는 일이기도 했지만 엘리엇 본인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이제 엘리엇은 삶이 힘들어질 때마다 하늘을 바라보며 우주 저편에 있는 친구를 추억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다른 존재와 자꾸 선을 긋는 방향으로 바뀌는 오늘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 ‘이티’ 포스터 [IMDb]
‘매경 뒤 시네마’는 OTT에서 감상 가능한 영화 속 경제 이야기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 구독 버튼을 누르면 더 많은 리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