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 없이도 말하는 배우, 염혜란의 ‘표정’을 질투하다

한겨레 2026. 3. 15. 09:06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
영화 <매드 댄스 오피스>. 엔케이콘텐츠 제공

※이 글은 영화 <매드 댄스 오피스>, <어쩔수가없다>, <빛과 철>,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마스크걸>의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든 게 꼬이고 꼬여 난장판이 된 한밤중의 사무실, 난데없이 스포트라이트가 밝혀진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서류 더미들 속에서 과장 ‘국희’(염혜란)의 등장. 그는 발등을 곧추세우고 구두 굽을 딱, 소리 나게 치며 스텝을 밟는다. 뜨거운 라틴 리듬이 주단처럼 펼쳐진 가운데, 춤이 시작된다. 온 마음으로, 전신을 펼치며, 오직 지금 이 몸짓에만 집중하며.

영화 <매드 댄스 오피스>는 매사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해왔으나 인생이 제대로 꼬여버린 구청의 기획과장, 국희의 이야기다. 싱글맘으로서 번듯하게 키워 내려 갖은 애를 쓴 딸은 가출하고, 부구청장 승진을 노리는 타 팀 과장은 저열한 중상모략으로 국희를 몰아세운다. 그때 운명처럼 마주한 것이 플라멩코. 인생의 사지에서 염혜란은 턱을 치켜들고, 발을 구르고, 표표한 얼굴로 라틴 리듬 위에 노련한 기수처럼 올라탄다. 그때 그가 짓는, 맹수처럼 사납고 비단처럼 간드러진 저 표정의 맛. 염혜란이 가장 잘하는 것이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모호필름 제공

유머와 절규가 절묘하게 버무려진 ‘고추잠자리’ 소동극의 주인공, ‘아라’라는 여자는 기묘하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에서 염혜란이 연기한 아라 말이다. 그는 퇴직한 남편의 낡은 자부심을 딱해하며 들들 볶다가 남자 후배를 집으로 데리고 와 화끈한 정사를 벌이고, 뱀에 물린 남자의 발목을 덥석 빤다.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웃고, 연극적인 손짓으로 유혹하며, 욕망을 숨기지 않는 눈으로 성큼 다가선다. 침입자와 남편 그리고 아라가 뒤엉켜 엎치락뒤치락 싸울 때, 결정적인 한 발을 쏘는 것은 역시 아라. 우악스러운 생명력과 묘한 관능으로 가득 찬 아라는 염혜란이 선보여 온 발산적인 연기의 정수다.

“내 딸, 내가 찾아가요.” 시댁 등쌀에 시달리던 딸 애순의 손을 붙들고 소리를 버럭 지르며 뛰쳐나가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광례’의 경우. 전쟁고아로 뭍에서 제주까지 떠밀려와 물질을 배워 악착같이 모진 삶을 부양하다 잠병으로 요절한 해녀 광례. 쉴 새 없이 일하는 엄마의 고된 하루를 사고 싶다는 딸 애순의 시를 읽을 때. 염혜란은 얼굴을 사정없이 구긴다. 양 눈썹이 대칭을 그리며 끝도 없이 치켜 올라가고, 미간은 잔뜩 좁혀지고, 입이 댓발 나오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때의 그 표정은 애달픈 서정의 얼굴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과 대적하는 자의 얼굴이며, 자신에게 유일한 이 귀한 것을 지켜내겠다는 결연한 얼굴이다. 그런 표정은 염혜란만이 지을 줄 안다.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의 악인 ‘김경자’는 또 어떤가. 아들이 살해당한 후 일생에 걸쳐 마스크걸을 추격하는 그는 피카레스크 극 중 또 다른 피카레스크의 주인공으로, 그다지 자랑스럽지도 사랑스럽지도 않던 아들이 죽은 후 모든 죄책감을 마스크걸에게 투사한다. 일자 앞머리에 칼 단발을 한 김경자가 장총을 들고 “영광, 영광, 할렐루야”라며 어금니로 짓씹듯 성가를 부르며 상대를 추격할 때의 기묘한 위엄을 보라. 세상에 이런 빌런이 있었던가? 그 추잡하면서도 우스꽝스럽고 살벌한 연기는 시청자를 한국식 서부극의 한 장면 속으로 데려간다.

개봉한 해,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을 비롯한 유수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쓴 영화 <빛과 철>에서 염혜란은 발산보다 절제의 ‘고’를 체득한 모습을 보여준다.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남편, 아빠가 자살하려 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딸, 교통사고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남자의 아내. 그 사이에서 여자는 그저 모든 걸 삭힌다. 꾹꾹 눌러 삼킨다. 그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 같다. 불현듯 불같이 치밀어 오르는 화에 의식을 잃은 남편의 뺨을 매섭게 올려치는 순간, 염혜란이 꺼내 드는 칼이 더욱 번쩍이는 이유다. 남편들이 사고를 당했던 어두운 도로를 질주하던 여자들의 차가 멈춰 서자, 환한 전조등 앞에 고라니 한 마리가 눈을 끔벅이듯. 영화와 염혜란의 연기는 호응하고 있다.

영화 <빛과 철>. 원테이크필름 제공

못난 남편을 쥐고 죽여 살려 하며 결국 살리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이혼 전문 변호사,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의 ‘매 맞으면서도 명랑한 년’이자 남편을 죽이려는 여자, 위안부 피해 여성의 삶을 그린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상처를 숨긴 이웃에게 서러움을 토해낸 진주댁, 핑크색 립스틱을 칠갑하고 호피 무늬 스카프를 두른 채 조카딸을 지지리도 구박하던 드라마 <도깨비>의 이모, 염혜란이 거쳐 온 배역들엔 생활감이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으면서도 연극적인 과단성이 있다. 나는 그것을 염혜란이라는 배우가 가진 표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지어내는 표정의 명암 속에서 나는 언제나 징글맞은 인간사의 진한 페이소스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자신이 웃고 말하고 우는 얼굴을 거울이나 영상을 통해 본 일이 있는가?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은 좀처럼 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다만 나는 내가 누군가와 웃을 때 카페 유리에 비친 얼굴을, 화장실 세면대 거울 앞에서 손을 씻을 때 옆 사람과 한두 마디를 나누는 얼굴을, 집중하는 주제에 대해 열변을 토할 때 맞은편 창문에 반사된 얼굴을, 힐끗 스스로의 얼굴을 본 기억이 조각조각 남아있다. 그때마다 느낀 건 나는 정말 표정을 짓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넷플릭스 제공

예쁘고 못생기고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짓는 표정엔 밑바닥을 들키지 않으려는 수세적인 방어벽, 분위기와 눈치를 살피는 알량함,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그냥 하는 말인지 진심인 건지도 모르겠는 기계적인 모호함이 뒤섞여 있다. 돼지비계며 부추며 이것저것 잘게 조사 넣고 비빈 속을 필사적으로 감싼 만두피처럼, 눈코입이 없는 얼굴을 하고선 필사적으로 얼굴 근육을 당기고 있다.

돌이켜 보면 내겐 매일매일이 만두 빚기의 수행이었다. 얼굴이 출력되지 않는 날엔 외출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의문도 들었다. 어떻게 사람들은 늘 저렇게 적당한 두께의 탄력 있고 매끄러운 만두피를 매일 빚어 얼굴을 감싸고 다니는 걸까? 섬세하게 제련된, 극도로 세련된 표정을 짓는 우아한 이들을 보며 애도 무진 써봤지만, 왜인지 잘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가 배우 염혜란의 연기를 보면서 그의 표정을 나도 모르게 따라 짓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건 학습을 의도한 모방이 아니었다. 나는 그냥, 입을 활짝 벌려 크게 웃고 소리치고 울고 타박을 놓고 환희하는 그의 표정을 따라 지으며 인물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내 안의 만두소 같은 것들이 다 쏟아져 나올 것처럼, 나는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염혜란의 표정대로, 춤추듯 얼굴 근육을 쓰고 있었다. 그건 꽤나 우스꽝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냐 하면 글쎄, 답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내가 평소에 지어왔던 표정보다는 훨씬 선명했다.

영화 <매드 댄스 오피스>. 엔케이콘텐츠 제공

나는 염혜란의 정직하고 투박한 표정이 좋다. 그의 표정이 만드는 풍경엔 늘 짙은 명암이 드리웠고 극적인 희로애락의 드라마가 있었다. 산세가 훤한 산처럼, 굽이치는 강처럼, 그는 선명하게 존재했다. 나는 좋았다. 나 대신 울고 웃어주는 그 얼굴이, 그럼으로써 결국 나를 웃기고 울리는 그 얼굴이.

영화 <매드 댄스 오피스>에는 염혜란이 사회성이 심히 떨어지는 초년생 후배에게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법을 단호히 일러주는 장면이 있다. “내가 팁 하나 줄까? 눈을 요러고 떠. 지면 안 돼, 지면 안 돼, 계속!” 그리하여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가 전수해 주는 거칠고 뜨거운 리듬 위에 올라타, 웃고 울고 찡그리며 세상을 한껏 쏘아보는 것이다.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은?

이예지 에디터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을 질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부러운 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지요. 이예지 에디터가 <GQ>, <아레나>, <씨네21>, <코스모폴리탄> 등 4개 매체를 거치며 지금껏 만난 사람들의 면면 중에 가장 열렬히 질투했던 구석을 파고든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https://www.hani.co.kr/arti/SERIES/3196?h=s)에서 사랑스러운 질투로 파고든 인사이트를 만나보세요!
이예지 에디터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