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탄 눈에 박힌 채 사망 김주열… 시신 옮긴 운전기사 56년 만에 참회

이한수 기자 2026. 3. 15.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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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60년 3월 15일 17세
1960년 마산상고 신입생 김주열.

1960년 3월 19일 조선일보에는 실종 아들을 찾는 중년 어머니의 안타까운 사연이 실렸다.

“19일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 93에 거주하는 김재계(金在桂·49)씨의 부인 권찬주(40)씨는 자기 아들의 마산상고 합격증을 손에 쥐고 부산지방 검찰청 마산지청 김 검사를 찾아 자기의 차남 김주열(金朱烈·17)군의 행방을 찾아달라고 대성통곡하면서 호소하였다. 권씨 호소에 의하면 김군은 우수한 성적으로 마산상업고등학교 입시에 합격되어 지난 15일 밤 마산시 장군동에 있는 그의 이모 집에다 책가방과 모자 등을 놓아둔 채 와이샤쓰 바람으로 나간 후 아직껏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하며 경찰에서 발표한 사상자 명단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1960년 3월 19일 자 석간 3면)

"내 아들 찾아주오" 1960년 3월 19일자 3면.

마산 지역에서는 앞서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의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이 시위 참가자를 무차별 구타하고 죽은 이를 연못에 던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머니 권씨가 찾던 아들 김주열(1943~1960)은 실종 27일 만인 4월 11일 발견됐다.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시신이 떠올랐다. 오른쪽 눈에 지름 5㎝, 길이 20㎝에 이르는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이었다. 시신은 마산도립병원으로 옮겨졌다. 소식을 들은 마산 시민들은 분노했다. 시민 2만여 명이 마산경찰서 앞에 모여 “불법 선거 다시 하자” “살인 진범을 체포하라”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다.

마산의 격분, 시체 보자 폭발. 1960년 4월 12일자 3면.

이튿날 신문은 ‘마산의 격분 시체 보자 폭발’ 제목으로 마산 상황을 전했다. 이틀 후엔 ‘김주열 군의 사인과 최루탄의 출처를 밝혀라’ 제목의 사설로 진실 규명을 촉구했다. 관련 기사는 연일 쏟아졌다. 김주열 피살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 하야와 자유당 정권 붕괴로 이어진 4·19의 도화선이었다.

사건은 당대로 완결되지 않았다. 3·15 당시 마산경찰서장 손석래는 도피 8년 만인 1968년 8월 검찰에 자수했다. 앞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는 서장 지시로 시신을 유기했다고 자백하고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1968년 8월 28일자 3면.

“3·15 마산 의거 때의 마산경찰서장 손석래(46)씨가 살인 등 혐의로 수배되어 도피한 지 8년 4개월 22일 만인 27일 서울지검 공안부 이종원 부장검사에게 자수했다. (중략) 이날 구속된 손씨는 60년 3월 15일 오후 7시 부정 선거에 항거하는 마산 의거 대열이 거리를 휩쓸 때 당시의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혁명재판에서 무기징역 확정)에게 실탄과 최루탄의 발포를 명령, 의거 군중에 끼어 있던 김주열(17) 군의 눈에 최루탄을 명중시켜 살해하는 등 13명을 살해케 한 혐의를 받고 있다.”(1968년 8월 28일 자 3면)

1971년 5월 29일자 7면.

3년 후인 1971년 5월에는 3·15 당시 발포 명령자로 수배된 마산지청장 서득룡이 사건 11년 2개월 만에 자수했다.

“서씨는 60년 3월 15일 마산시청 앞 광장에서 부정선거 규탄 데모대를 저지하던 마산경찰서장 손석래 총경에게 발포 명령을 내려 김주열 군 등 2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었다. 그동안 서울·대전·진주·부산·대구 등지의 친지 집에 숨어 살아왔다는 그는 “죄의 대가를 받고 떳떳이 살고 싶어 자수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서씨를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는데 이 죄의 공소시효는 15년이다.”(1971년 5월 29일 자 7면)

김주열 시신을 싣고 지프차를 운전한 기사 김덕모씨는 2016년 3월 마산 ‘국립 3·15 민주묘지’의 김주열 열사 묘비 앞에 무릎 꿇고 참회했다. 사건 56년 만이었다.

2016년 3월 15일자 A12면.

“당시 스무 살이던 김씨는 마산 지역 한 사업가의 지프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지프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경찰이 가끔 차를 빌려 썼다고 한다. 김주열이 숨진 다음 날인 3월 16일 새벽에도 경찰의 연락을 받고 마산세무서 앞으로 갔다. 김씨는 “탱자나무 울타리 옆 도랑에 눈에 최루탄이 박혀 숨진 채로 누워 있는 시신이 있었다”며 “너무 놀랐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중략) 김씨는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이 안 되겠지만 김주열씨가 천국에서 행복하게 지내길 기도하겠다”고 했다.”(2016년 3월 15일 자 A12면)

김주열의 부모와 형제들은 비극을 가슴에 품고 살다 세상을 떠났다.

1999년 4월 19일자 31면.

“윤택했던 집안은 주열의 죽음 이후 풍비박산이 됐다. 아버지 김재계씨는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 65년에,어머니 권찬주씨도 89년 투병 끝에 아들 곁으로 떠났다. 형 광렬씨는 80년 뇌출혈로,동생 택렬씨는 7년 전 알 수 없는 병으로 세상을 떴다.”(1999년 4월 19일 자 31면)

김주열의 누나인 영자·경자씨와 동생 길렬씨는 1999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주열이 뼈가 묻힌 고향(남원)의 묘지도 90년 성역화됐으나 당국의 관리가 안 돼 방치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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