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어때서… 은퇴란 없다” [S스토리-100세 시대…진화하는 노인 일자리]
거리 청소 등 단순 공공근로에서 벗어나
연륜과 기술 활용하는 일자리 늘고있어
지자체 ‘친환경 도슨트’ 등 특화모델 추진
“시니어 일자리 사업 이젠 복지 차원 아닌
지역 서비스·경력 등 감안 재설계해야”
“주문하신 초밥 나왔습니다.”
회색 페도라에 붉은 체크 앞치마를 두른 공용자(74)씨가 손님 앞에 접시를 내려놨다. 망설임이 없다. 동작은 빠르고 말투는 단정했다. 지난 4일 오전 11시30분 울산 남구 신정동. 울산시청 맞은편 초밥전문점 ‘스시은(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공씨와 또래 어르신들이 분주히 손님을 맞고 있었다. 점심시간 전인데도 4인용 테이블 8개가 만석이었다.

청년 요리사와 어르신들이 한 팀으로 일한다. 김형무(41) 요리사가 초밥을 만들고, 60~70대 어르신 17명이 4~5명씩 조를 나눠 홀과 주방을 맡는다. 공씨는 “하루 4~5시간 일주일에 세 번 출근해 한 달에 50만~60만원 정도 번다”며 “바쁠 때는 정신없지만 힘에 부치진 않고, 무엇보다 일하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주방에서 일을 하는 장정희(71)씨는 “된장찌개만 끓이던 할머니였는데 어렵게만 느껴지던 일식도 이젠 해낸다”며 활짝 웃었다. 김 요리사는 “처음엔 어르신들과 삐걱댔는데 이제는 손발이 척척 맞는다”고 말했다.
노인일자리사업이 진화하고 있다. 거리 청소나 교통정리 같은 단순 공공근로 형태에서 벗어나 노인의 연륜과 기술, 새로 배운 역량을 활용하는 일이 늘고 있다.

피자 재료도 동네 방식으로 채운다. 옥상 텃밭에서 토마토·바질·루꼴라를 키우고, 겨울철엔 지역 농가에서 재료를 사온다. 어르신들이 만든 피자는 매장에서 판매될 뿐만 아니라 전주 지역 87개 아동·청소년 사회복지시설과 지역아동센터, 공동생활가정 등에도 제공된다. 일자리와 나눔이 함께 굴러가는 구조인 셈이다. 신애란(63)씨는 “오븐 문을 여는 순간이 제일 설렌다”고 말했다.

기찬밥상과 함께 운영되는 ‘기찬빨래방’은 매장 운영과 이동 세탁 서비스를 병행한다. 매장 수익으로 기반을 만들고, 이동 세탁 차량으로 읍·면 지역 고령자와 장애인 가정을 찾아가 무료 세탁 서비스를 제공한다. 대형 이불 같은 세탁물을 수거해 마을회관 등에서 세탁·건조 후 다시 전달하는 방식이다. 장영범 영암시니어클럽 관장은 “어르신들이 생애 마지막 직장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일해 근로 의욕이 높다”고 말했다.
경북 문경의 ‘동네점빵’도 비슷한 흐름이다. 들기름, 표고, 꿀, 건어물, 오미자청, 쌀 같은 지역 특산물의 유통단계를 줄여 시중가보다 저렴하게 판매한다. 문경시니어클럽이 운영하는 시니어 공동체사업단으로, 노인 14명이 ‘주인의식’을 갖고 일해 화제다. 노모(75)씨는 “손님 응대부터 계산, 배달까지 한다. 직원 한 명 한 명이 일당백”이라며 “땀 흘려 일하는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
디자인 물품 판매에도 어르신들이 뛰어든 모양새다.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 부림지하상가 한 편의 ‘다시, 그린’은 한동안 비어 있던 점포였다. 그런데 지금은 문화공간처럼 바뀌었다. 평균 연령 60대 후반인 어르신 20명이 교대로 공간을 지키며, 폐플라스틱 병뚜껑을 모아 키링(열쇠고리)으로 재탄생시킨다. 버려진 자원을 상품으로 바꾸고 판매 수익도 얻는다. 방문객은 자연스럽게 자원 순환과 가치 소비를 체감한다.
어르신들은 ‘이야기꾼’으로도 활약 중이다. 부산시는 올해 ‘ESG여행 도슨트’라는 새로운 노인일자리사업을 추진한다. ESG여행 도슨트는 관광과 역사, 환경을 결합한 새로운 유형의 어르신 특화 일자리 모델이다. 지역의 관광명소에 대한 역사와 옛 이야기를 어르신 본인만의 스토리로 담아 들려주고, 관광명소를 보존하기 위한 대안을 친환경적인 시각으로 설명해 주는 새로운 유형의 해설가다. 이 사업은 이달부터 12월까지 시행한다.
초밥을 내던 손, 피자를 굽는 손, 쿠키를 빚는 손, 특산물을 배달하는 손, 병뚜껑을 키링으로 바꾸는 손. 이들 일자리의 공통점은 나이가 많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연륜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변화가 초고령사회 진입과 함께 더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노인복지분야 전문가인 허창덕 영남대 교수(사회학)는 12일 “일본에서도 고령자 일자리는 청소·단순 업무 중심에서 지역 서비스와 시장 수요를 결합한 모델로 확대되는 추세”라며 “한국도 고령화 속도가 빠른 만큼 노인일자리를 복지사업에만 가두기보다 지역경제의 인력 기반으로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허 교수는 “인공지능(AI) 발전에 따른 일자리, 퇴직 고령층 경력에 맞는 일자리 등 새로운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창출할 필요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울산·전주·문경=이보람·김동욱·배소영 기자, 전국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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