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본인이 다가와 내게 물었다”…서로 다르지만 목표는 같았던 마라톤 [르포]
새벽부터 태평양 보며 달리는 마라톤
이슬비는 급수, 응원은 에너지젤 역할
모두가 주인공 러닝 축제 분위기 ‘훈훈’
마라톤은 혼자만의 싸움이다. 한 걸음도 남이 대신 뛰어줄 수 없다. 하지만 서로의 목격자가 돼줄 수는 있다. 누군가 나의 싸움을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달려 나갈 힘이 난다.

이날 참가자는 약 772명. 오는 15일 열리는 ‘서울마라톤’ 참가 인원이 약 4만 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50분의 1 수준이다. 병목현상이 없는 건 당연하고, 도로 위에서 혼자 달리는 경험까지 가능했다.

참가자들은 태평양을 끼고 풀코스 42.195㎞, 하프코스 21.0975㎞, 10㎞, 5㎞ 코스를 달린다.
새벽 5시. 150여 명의 하프코스 참가자와 함께 출발선에 섰다. 이번 대회의 목표는 단 하나. 컷오프(제한 시간)인 3시간 30분 안에 들어오는 것. 태어나 가장 긴 뜀박질을 앞두고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3, 2, 1 출발!”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어폰을 두고 나온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덕분에 두 귀와 두 눈을 열고 사이판의 길 위 풍경을 온전히 담으며 달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이판 마라톤에는 노래보다 더 큰 힘이 되는 요소가 곳곳에 있었다.

이 순간 참가자는 마치 시골 할머니 집에 놀러 간 손녀가 된다. 잠시 멈춰서 물을 먹고 있으면 “물 마셔요. 오렌지 먹어요. 스펀지 필요한가요? 파워에이드도 있어요”라는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손사래를 치느라 진땀이 날 정도다.

7㎞쯤 달렸을 때는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다리가 무거워지던 차에 오히려 리프레쉬가 됐다. 두 팔을 벌리고 온몸으로 비를 맞이했다. 흠뻑 젖은 그 순간만큼은 더 이상 비에 젖지 않는 기분이었다.

이쯤에서 마라톤을 만끽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온몸으로 흡수한 응원을 다시 내뿜기. 목격당한 만큼 목격하는 것이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이지만 한 번만 용기를 내면 얼마나 값진 일인지 알게 된다.
분명 상대에게 힘내라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힘이 나는 쪽은 오히려 나 자신이었다. 반환점을 돈 후 뒤 따라오는 러너들에게 배운 걸 그대로 써먹었다. “멈추지 마요! 거의 다 왔어요!”


비바람을 맞은 뒤 만난 바다 위 무지개에는 큰 감동이 있었다. 에너지젤을 먹은 듯 힘이 불끈 났다. 느릴지언정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던 ‘간바레’ 참가자도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기꺼이 멈춰 섰다.
마지막 3㎞는 어떻게 달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1㎞만 더! 1㎞만 더!’를 속으로 되뇌며 발을 내딛다 보니 마침내 저 멀리 결승선이 보였다. 도저히 속도를 더 내지 못할 것 같아도 결승선이 보이는 순간 두 다리가 빨라진다.

기자의 기록은 3시간 5분. 1㎞당 평균 8분 47초 페이스이니 걸어온 것 아니냐는 말을 들어도 부정하기 어렵다. 지인들은 “기록을 보니 정말 끈질기게 해낸 것 같아서 더 존경스럽다”며 조롱 섞인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무렴 상관없다. 컷오프에 걸리지 않고 완주하는 것이 목표였으니 대성공이다.
같은 시간대로 들어온 50대 엄마는 55~59세 여성 나이대 3위를 차지했다. 인원이 많지 않은 대회라 가능한 일이었지만 기록표에 찍힌 ‘3’이라는 숫자는 두 모녀를 기쁘게 하기에 충분했다.

속도가 전부는 아니다. 이날 풀코스의 공식 마지막 완주 기록은 8시간 14분이었다. 새벽 4시에 출발해 정오가 넘어서야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다. 8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달려낸 러너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입상, 기록 단축, 완주 또는 참가 그 자체까지 사이판 마라톤은 저마다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축제였다.

대회 전날 참가자들은 배번표를 수령해야 한다. 이때 사전 신청 시 선택한 치수의 티셔츠도 함께 제공하는데, 현장에는 같은 치수가 없어 신청한 것과 다른 티셔츠를 받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경기 당일 완주 후 메달과 함께 나눠주는 기념품 봉투 역시 수량이 부족해 일부 완주자는 받지 못했다.
도로 통제도 충분하지 않았다. 국내 마라톤처럼 전면 통제가 이뤄지는 방식이 아니라 중간중간 경찰이 서서 교통을 정리하는 수준이었다. 해가 뜨기 전 차량이 옆을 지나는 구간에서는 다소 위험하게 느껴졌다.

사이판 김지은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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