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 너머 숨은 고요를 찾아…고속도로 옆 미술관 ‘칼더의 정원’ [슬기로운 미술여행]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6. 3. 14.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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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미술여행 - 58] 필라델피아 칼더 가든 & 반스 재단 미술관

이번 주부터는 미국 여행으로 번외편을 써봅니다. 필라델피아와 뉴욕 이야기는 길지 않은 분량으로 이어가 보겠습니다. 난생처음 가본 필라델피아의 첫인상은 무시무시했습니다. 한겨울 추위를 떠나서 치안이 좋지 않다는 게 한낮에도 느껴질 정도였거든요. 이 도시에서 추위를 뚫고 다녀온 미술관이 있습니다.

따끈따끈한 신상 뮤지엄, 칼더 가든
작은 집처럼 보이는 미술관이 정원에 둘러싸여 있다. ©Herzog & de Meuron
필라델피아는 미국의 가장 오래된 도시입니다. 미국의 독립시기(1790~1800)에 워싱턴 D.C. 이전의 수도였던 곳이죠. 시청이 있는 도심에서부터 북서쪽으로 길게 뻗은 대로인 뮤지엄 마일(Museum Mile)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도심과 미국 7대 미술관 중 하나이자 ‘록키 계단’으로 유명한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잇는 길입니다.

미국 최초의 미술관이자 예술 학교인 펜실베이니아 순수미술 아카데미가 있는 도시답게 꽤 막강한 뮤지엄 라인업을 보유하고 있더군요. 일단 록키를 만나는 건 다음 기회로 미루고, 가장 먼저 찾았던 반스 재단(The Barnes Foundation)과 알렉산더 칼더 가든을 소개해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 파크웨이 주변에는 로댕 미술관도 있었지만, 저는 방문하진 않았습니다.

칼더 가든(Calder Gardens)은 2025년 9월 필라델피아에 개관한 따끈따끈한 신상 미술관입니다. 모빌의 창시자 알렉산더 칼더의 예술을 건축과 자연으로 구현한 특별한 공간이죠. 개관 직후부터 미국의 언론에서 “기존 미술관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은 혁신적 공간”이라는 찬사를 받아 꼭 가보고 싶었는데요. 겨울에 찾은 정원이 아름다울 수는 없더군요. 꽃이 져버린 정원의 황량함을 목격하니 정말 아쉬웠습니다.

이 곳은 놀랍게도 고속도로변의 전혀 미술관에 어울리지 않는 부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피터 우돌프가 구상한 정원의 250여 종의 식물이 있는 풍경 속에 헤르조그 앤 드 외론이 설계한 칼더 가든이 숨어 있었죠. 건축물이 너무 작아서 추사의 세한도에 나오는 작은 집처럼 보이더군요.

1,700㎡(514평) 규모의 미술관에는 칼더의 작품이 순환 설치됩니다. 예술가의 50년 경력과 다양한 작품들을 아우르는 이 작품들은 예술사적 서사보다는 건축과 자연에 더 집중한 것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이 작품들은 순환하는 동안 계절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반영합니다. 어떤 것들은 몇 년 동안만 남아있을 것이고, 다른 것들은 몇 달 동안만 볼 수 있어, 가까이서 보고 반복적으로 방문하도록 장려하는 것이 목표라는군요.

지하로 내려오면 선큰에 조성된 전시 공간이 나타난다. ©Herzog & de Meuron
이 공간은 칼더의 유산과 현대 미술과 연결하는 공연, 음향 경험, 상영, 강연 및 기타 이벤트를 활발하게 열고 있었습니다. 마음챙김과 환경을 강조하며 삶의 모든 요소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공간을 지향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칼더는 1920년대에 새로운 조각 형식을 발견하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와이어를 구부리고 비틀어 공간에 3차원 도형을 ‘그리는’ 것이었죠. 그는 정지된 추상적 요소들이 변화하는 조화 속에서 움직이고 균형을 이루는 모빌의 발명으로 유명합니다. 1950년대 이후로 칼더는 볼트로 된 강판으로 야외 조각을 만드는 데 점점 더 헌신했는데요. 덕분에 오늘날 이 위풍당당한 거인들은 전 세계 도시의 공공 광장을 빛내고 있습니다.

칼더는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도시와의 연결은 그의 가족의 풍부한 예술적 혈통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알렉산더 스털링 칼더는 스완 기념 분수를 만들었고, 할아버지 알렉산더 밀른 칼더는 시청 꼭대기에 서 있는 윌리엄 펜 동상을 조각했습니다. 칼더의 모빌 유령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그레이트 스테어 홀에 걸려 있죠.

정원의 입구부터 위압적이지 않습니다. 작은 팻말 하나에 미술관 이름이 적혀 있었고 야생화가 가득한 정원과 낮은 금속 구조물이 손님을 맞아주더군요. 소박한 건물은 주변 박물관들의 웅장한 외관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조경 정원 아래 반지하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자크 헤르조크는 “예술 작품들이 다양한 공간적 맥락 속에서 자신의 다양성과 모호함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무-디자인’ 건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칼더는 21세기의 미술관이라면 필수품처럼 꼭 하나씩은 소장한 익숙한 얼굴이지만, 이 곳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소박했습니다. 로비를 지나 어둡고 거친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직육면체 계단을 통해 내려갑니다. 계단 아래 공간에서는 지하층임에도 빛이 스며들어 선큰 가든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성큰 가든의 벽에는 그의 낯선 회화 작품과 스케치가 걸려 있었습니다. 구부러진 빛에 민감한 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조도를 낮추는 역할을 합니다.

특별한 공간 경험을 안겨주는 곳이었습니다.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아니라, 성큰 가든과 베스티지 가든(Vestige Garden) 등 실내외를 연결해 시간에 따라 변하는 자연과 예술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기도 했고요. 사실 금방 둘러볼 수 있는 작은 곳이지만, 왠지 떠나기 싫어지는 미술관이었습니다. 대로변에 있음에도 지하 공간에서는 소음이 사라지고, 정적인 경험을 선사하는 것도 놀라웠고요.

지하로 내려오면 성큰에 조성된 전시 공간이 나타난다. ©Herzog & de Meuron
반스 할아버지는 인상파를 왜 이렇게 좋아하셨나요
논란 끝에 이전된 반스 재단의 신상 건물. ©The Barnes Foundation
벽을 빽빽하게 채운 그림들은 ‘앙상블’ 방식으로 배치됐다. 정면 상단에 걸린 그림이 조르주 쇠라의 [모델들] ©김슬기
칼더 가든에서 머지 않은 곳에 또 하나의 작지만 놀라운 미술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스 재단은 알버트 반스가 수집한 미국 최대 규모의 인상주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미술관입니다.

제약사업으로 큰돈을 번 앨버트 C 반스(1872~1951) 박사가 1922년 설립한 미술관입니다. 제약 사업으로 큰 재산을 모은 반스는 1912년에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제약 사업으로 큰 재산을 모은 후, 그는 당시 ‘최고의 현대 미술 컬렉션’ 구축에 집중했죠.

그해 2월, 그는 친구이자 화가인 윌리엄 글래킨스를 파리로 보내 프랑스 아방가르드의 회화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글래킨스는 반 고흐의 <우체부>(1889)와 피카소의 <담배를 든 젊은 여자>(1901)를 포함해 33점의 작품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이 미술관의 대표작이 됩니다. 1년 전 런던 내셔널갤러리의 반 고흐 특별전에서 만났던 <우체부>가 반스의 첫 번째 소장품이었다는 사실이 반갑고도 신기했습니다.

그는 이 시작을 계기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초기 모더니즘 작품들을 대거 수집했는데요. 르누아르 181점, 세잔 69점, 마티스 59점, 피카소 46점 등 약 4,000점 이상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미술관은 원래 펜실베이니아주 메리온(Merion)에 있었는데 2012년 필라델피아로 이전하면서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반스의 유언에는 컬렉션을 이전하지 말라는 조건이 있었거든요. 이 과정은 2009년 다큐멘터리에서 집중 조명되기도 했죠. 건축가 토드 윌리엄스 & 빌리 치엔(Tod Williams Billie Tsien Architects) 이 설계한 현재 건물은 메리온의 원래 갤러리의 크기와 작품 배치 방식을 인치 단위까지 그대로 재현했다는군요.

반스의 독특한 철학에 따라 작품들은 앙상블(ensemble)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는데요. 일반적인 미술관처럼 연대순이나 작가별로 전시하지 않고 작품의 형태, 색상, 빛, 구성을 중요시했던 반스의 유연에 따라 그림 옆에 수공예품, 아프리카 조각품, 가구 등을 함께 배치했습니다. 이는 관람객이 예술적 연관성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독특한 방식인데요. 고가구도 놓여 있어 그야말로 잘 꾸며진 저택을 거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건물 외부의 거울 연못 앞에는 엘즈워스 켈리의 <반스 토템>(2012)이 이전과 함께 설치됐습니다. 소장품이 걸린 메인홀의 앙리 마티스의 <춤>이 벽을 장식하고 있는데요. 메리온 건물의 천정에 어울리도록 의뢰한 벽화를 그대로 옮겨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우체부], 1889 ©The Barnes Foundation
피에르 보나르 [글쓰는 젊은 여인], 1867 ©The Barnes Foundation
조르주 쇠라의 <모델들>, 세잔의 <카드 플레이어들>가 이 곳의 간판입니다. 문 위에 걸려 있어 눈에 띄는 그림으로 피에르 보나르의 <글 쓰는 젊은 여인>도 일상의 평온함을 그린 소재와 대비되는 붉은 색의 강렬한 색채 조합으로 사랑받는 작품이죠.

때마침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개인전도 열리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미술관에 가면 단골처럼 만날 수 있는 이 작가의 이토록 많은 작품을 한자리에서 본 건 처음이었죠. 세관원 출신으로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루소의 대표작을 망라한 전시는 독특한 초상화, 매혹적인 정글 그림들, 그리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화풍을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대표작 <집시 여인>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이곳으로 건너와 있더군요. 달빛이 청청한 사막의 밤에, 만돌린과 물항아리를 옆에 둔 집시 여인이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사자 한 마리가 조용히 다가와 여인의 냄새를 맡고 있지만, 둘 사이에는 어떤 긴장도 없죠. 기묘하고 평화로운 광경입니다.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였던 앙리 루소의 이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만난 뒤, 곧장 저는 초현실주의 전시를 보게 됐습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말이죠. 이날의 미술 여행은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앙리 루소의 개인전. 때마침 뉴욕에서 온 [잠든 집시]를 만났다. ©김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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