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다시 읽기: 2026년의 시선 3]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박찬욱의 『어쩔수가없다』 영화와 비교하며...

김현주 기자 2026. 3. 14.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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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양심은 아직 인간의 마지막 장치인가
[고전 다시 읽기: 2026년의 시선 3]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박찬욱의 『어쩔수가없다』영화와 비교하며...    / 사진=생성형AI이미지

[한국독서교육신문 김현주 기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오래된 소설이지만, 읽을 때마다 시대가 바뀐 만큼 질문도 달라진다. 19세기 독자에게 이 작품은 가난한 청년의 범죄와 구원에 관한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2026년의 독자에게 『죄와 벌』은 다른 장면으로 다가온다. 기술은 정교해지고 사회는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는데, 인간의 양심은 과연 그만큼 단단해졌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물음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와 함께 놓을 때 더 날카로워진다. 이 영화는 제지회사에서 25년간 일한 만수가 구조조정으로 밀려난 뒤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는 실업과 불안,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한 번 무너진 도덕 감각이 어디까지 미끄러질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작품은 2025년 9월 개봉 이후 큰 호불호를 낳았지만, 청룡영화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포함한 주요 상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두 작품은 모두 살인을 다루지만, 죄를 대하는 시선은 전혀 다르다. 바로 그 차이가 오늘 이 두 작품을 함께 읽어야 할 이유다.

『죄와 벌』은 "양심이 인간을 무너뜨린다"고 말한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을 '비범한 인간'이라고 여긴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하찮은 존재 하나쯤 제거해도 된다고 믿는다. 여기에는 위험한 확신이 들어 있다. 자신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도덕의 바깥에 설 수 있다는 확신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논리를 오래 두지 않는다. 라스콜니코프가 무너지는 이유는 수사망 때문이 아니다. 범행 직후부터 시작되는 불안, 열병, 혼란, 타인과의 단절이 먼저 그를 잠식한다. 법의 판결보다 먼저 양심이 그를 재판하는 셈이다. 『죄와 벌』이 오래도록 '양서'로 읽혀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죄를 감출 수는 있어도 내면에서 그것을 지워낼 수는 없다는 점, 그리고 인간 안에는 아직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수 있는 감각이 남아 있다는 점을 이 소설은 끝내 놓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냐라는 인물을 통해 이 세계를 더 단단하게 붙잡는다. 소냐는 죄를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대신 죄를 저지른 인간도 다시 사람 쪽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죄와 벌』의 핵심은 범죄의 기술이 아니라 회개의 가능성에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보다 "나는 과연 내 자신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어쩔수가없다』는 "양심은 반복에 따라 무뎌질 수 있다"고 보여준다

반면 『어쩔수가없다』의 만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간다. 처음부터 악인인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가족을 지키고 싶고, 직업적 자존심도 있으며, 무너진 삶을 어떻게든 붙들고 싶어 하는 평범한 가장에 가깝다. 그래서 더 불편하다. 악이 특별한 괴물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압박과 불안, 절박함 속에서 조금씩 일상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찝찝한 이유는 만수가 처음에는 주저하고 흔들리다가도, 한 번 선을 넘은 뒤에는 점점 더 빨리 다음 단계로 이동한다는 점에 있다. 죄책감이 완전히 사라진다기보다, 죄책감을 덮는 기술이 점점 능숙해진다. 처음에는 토하고 머뭇거리지만, 나중에는 현장을 정리하고 증거를 지우고 상황을 조작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불편한 진실 하나를 내민다. 인간은 양심이 있어서 죄를 멈추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반복을 통해 양심의 감도를 낮출 수도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아내 미리의 변화는 이 영화를 더 무겁게 만든다. 처음에는 남편의 이상 징후를 감지하고 거리를 두는 듯하지만, 결국 가족의 생존이라는 이름 아래 그의 범죄를 묵인하는 쪽으로 기운다. 여기서 영화는 범죄가 개인의 일탈에 머무르지 않고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합리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상황 설명이 아니라, 스스로를 용서하기 위한 문장이 된다.

같은 살인, 다른 결말… 두 작품은 인간을 전혀 다르게 본다

『죄와 벌』과 『어쩔수가없다』를 나란히 놓으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결말의 온도 차다. 『죄와 벌』에서 죄는 숨길 수 있을지 몰라도, 벌은 이미 인간의 내면에서 시작된다. 고백은 법적 절차이기 전에 인간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는 첫 걸음이다.

그러나 『어쩔수가없다』에서는 정반대의 장면이 펼쳐진다. 만수는 끝내 사회적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재취업에 성공하고, 가족은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심한 불쾌감을 느낀다. 죄를 지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결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영화의 핵심이다. 이 작품은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영화라기보다, "어떤 사회에서는 죄를 지은 뒤에도 사람이 계속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양심이 무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즉 『죄와 벌』이 인간 안의 양심을 끝까지 신뢰하는 작품이라면, 『어쩔수가없다』는 그 양심이 환경과 반복 앞에서 얼마나 손쉽게 둔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AI 시대에 더 섬뜩한 작품은 어쩌면 『어쩔수가없다』일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공장 장면은 이 비교를 2026년의 질문으로 밀어 올린다. 만수가 새로 출근한 공장은 거의 전 공정이 자동화되어 있고, 인간 노동자는 사실상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초기 보도와 작품 정보에서도 영화는 제지회사 관리자가 인수합병과 구조조정 속에서 밀려나는 설정을 중심에 둔다.

이 장면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인간이 밀려난 자리에서 남는 것은 기계의 효율과 생존 경쟁뿐이라는 암시다. 그런 세계에서 "누군가 빠지면 자리가 생긴다"는 논리는 더 이상 일탈적 사고가 아니라 시스템의 언어처럼 들린다. 그래서 『어쩔수가없다』는 AI 시대의 노동 불안과 도덕 감각의 마모를 함께 건드리는 영화로 읽힌다.

이 대목에서 『죄와 벌』은 다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라스콜니코프 역시 자신이 더 큰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을 계산 가능한 존재로 취급했다. 오늘의 알고리즘 사회도 비슷한 위험을 안고 있다. 효율을 위해 누군가를 잘라내고, 순위를 매기고, 배제하는 일은 너무 쉽게 합리화된다. 다만 『죄와 벌』은 그 계산 끝에서 인간의 양심이 여전히 반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어쩔수가없다』는 그 반격마저 약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인가는 독자와 관객의 몫이다.

그래서 『죄와 벌』은 여전히 읽어야 할 책이 된다

『죄와 벌』은 읽고 나면 사법의 판단 이전에 인간 안의 양심이 먼저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반면 『어쩔수가없다』는 그 믿음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의 작품은 인간을 붙드는 마지막 끈으로서의 양심을 이야기하고, 다른 하나의 작품은 그 끈이 서서히 느슨해지고 결국 끊어질 수 있는 과정을 보여준다.

고전을 다시 읽는 일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죄와 벌』은 단지 옛 러시아 소설이 아니라, 오늘의 독자에게 "인간이 끝내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책이다. 그리고 『어쩔수가없다』는 그 질문에 가장 불편한 방식으로 응답한다. 양심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멀리 미끄러질 수 있다고.

2026년에 『죄와 벌』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결국 이런 뜻일지 모른다. 기술이 더 정교해지고 사회가 더 계산적으로 변할수록,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마지막 장치가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것을 양심이라 불렀다. 박찬욱은 그 양심이 무뎌지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두 작품을 함께 보고 나면 독자는 더 이상 가볍게 묻기 어려워진다. 죄를 짓고도 정말 멀쩡하게 살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삶을 과연 '멀쩡하다'고 부를 수 있는가.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첫째,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결국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은 법의 처벌이 아니라 스스로의 양심이라고 말한다. 반면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그 양심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쉽게 무뎌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늘의 사회에 더 가까운 풍경은 어느 쪽일까.

둘째, 가족의 생존과 개인의 윤리가 정면으로 충돌할 때 사람은 어디까지 이해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더 이상 이해가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합리화가 되는 것일까.

셋째, AI와 자동화가 인간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해 가는 시대에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단순한 현실의 설명일까. 아니면 책임을 미루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가장 편리한 변명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