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기갈기 찢긴 회사, 그런데 더 부유해졌다…악당의 길 택한 혁신가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6. 3. 1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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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145][브랜드로남은사람들-78]존 록펠러

[브랜드로 남은 사람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은 이름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된 창업자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콘텐츠입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거시 경제 뒤흔드는 유가 변동성
중동에서 미국과 이란의 충돌로 유가가 출렁이고 있다. 유조선 항로가 불안해지고 생산량 감축이 이어지며 원유가격이 급등락을 반복중이다. 한국의 휘발유 가격 역시 급등했다. 특히 현재 전세계 경제에서 석유는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산업 전체를 움직이는 피와도 같은 존재다. 유가 상승 여파가 전세계 경쟁성장률을 떨어트릴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결과를 놓고 불안감 역시 커지고 있다.
국제유가, G7 비축유 방출 가능성에 배럴당 80달러대로 반락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10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 서부텍사스산원유 선물가격이 표시되고 있다. 간밤에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이 중동 전쟁 종식에 대한 기대감에 반락했다.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언론 인터뷰에서 “전쟁이 곧 끝날 수도 있다”고 발언하자 오름폭을 축소, 한때 배럴당 85달러까지 하락했다. 2026.3.10 jjaeck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지금은 전세계 산업의 중심이 된 석유지만 초창기만 해도 이렇게 산업 필수재가 될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정확히는 자동차나 항공기, 선박이 발명되기 전부터 석유는 쓰였다. 전기가 도시를 완전히 밝히기 전, 미국의 밤을 책임지던 것이 바로 석유였다. 정확히는 지금 난로 등 난방용으로 주로 쓰이는 등유가 석유산업의 첫 상품이었다.

지금 사람들이 배터리와 반도체를 전략물자로 보듯, 19세기 미국인들에게 석유는 램프를 켜고 공장을 돌리고 일상의 시간을 연장해주는 핵심 에너지원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 이 검은 액체를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거대한 산업 질서로 바꿔버린 한 남자가 등장한다.

석유왕, 존 록펠러
그의 이름은 존 D. 록펠러. 철강왕 카네기, 금융왕 J.P.모건과 함께 미국 자본주의의 왕좌를 나눠 가진 또하나의 왕, 석유왕 록펠러다. 그리고 그가 세운 전설의 기업, 스탠다드 오일은 현재 석유 산업의 뿌리로 여전히 그 영향력을 막강하게 흩뿌리고 있다. 유정을 모두 가진 것도 아니고, 세상 모든 원유를 혼자 캐낸 것도 아니지만 정유와 운송, 가격과 재고, 유통과 자금 흐름을 묶어 산업 전체의 문법을 새로 써버린 기업가 록펠러. 록펠러가 집착한 것은 석유 그 자체보다도, 석유를 둘러싼 ‘통제 가능한 구조’ 그 자체였다.
존 록펠러
불안한 집안에서 자란 소년, 숫자에 먼저 매달리다
1839년,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미국 뉴욕주 리치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발은 훗날 세계 최대 부호가 될 인물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는 떠돌이 기질이 강했고, 집안은 늘 안정적이지 않았다. 반면 어머니는 검소하고 엄격한 신앙인이었다. 불안정한 아버지와 질서와 절약을 가르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록펠러는 그 틈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의 존 록펠러
어린 시절의 그는 화려한 꿈을 좇는 아이가 아니었다. 무엇을 발명할까보다, 무엇이 얼마가 들고 얼마가 남는지에 더 민감했다. 장부를 쓰고,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고, 비용과 이익을 쪼개 계산하는 습관이 일찍 몸에 밴 록펠러는 발명가나 모험가라기 보다 계산에 밝은 관리자의 기질을 품고 있었다.
천재 발명가가 아니라 상업가로 출발하다
10대의 록펠러는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에서 일찌감치 일터로 들어간다. 사무실에서 장부를 보고, 대금을 맞추고, 물건의 흐름을 익히는 일.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사무직의 시작이었지만, 이 시기 그는 시장이 움직이는 방식을 아주 빠르게 익힌다. 세상은 늘 들썩이지만, 돈은 결국 흐름을 잡는 사람에게 간다는 점을 말이다.

그는 회계와 상업의 언어를 배우며 그는 점점 확신한다. 누가 더 큰 소리를 치는지가 아니라, 누가 더 싸게 만들고 더 효율적으로 보내고 더 안정적으로 파는지가 결국 승부를 가른다는 것을.

젊은 시절의 록펠러
그리고 1849년, 미국은 골드러시로 들끓었다. 사람들은 캘리포니아로 몰려가 금을 찾아 헤맸다. 여기서 위대한 사업가 라비아 스트라우스는 모두가 금광으로 몰려갈 때, 광부들에게 청바지를 팔며 새로운 산업을 개척했다. 그로부터 10년뒤, 미국은 새로운 산업 열풍이 불어닥친다. 바로 석유의 시대다. 전기가 대중화되기 전, 미국의 밤을 밝히던 것은 등유였다. 오늘날 캠핑 브랜드 콜맨의 출발이 램프와 연결돼 있듯, 당시 에너지 산업의 중심에는 ‘빛을 내는 기름’이 있었다. 사람들은 유전을 좇았다. 석유가 솟는 땅을 찾아 몰려들었다. 그러나 록펠러는 많은 이들과 다른 방향을 바라봤다.

그는 유전보다 정유에 관심을 가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유전의 발견은 운의 영역이었지만 정유는 예측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땅을 뚫어 석유가 나올지 말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이미 나온 원유를 어떻게 정제하고, 어떻게 표준화하고, 어떻게 더 많이 더 싸게 시장에 내놓을지는 준비가 가능하다. 록펠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석유산업의 미래를 봤다.

석유를 캐는 대신 정유를 택한 사업가
1860년대 록펠러는 농산물 중개 사업으로 자본을 축적했다. 그리고 1863년 본격적으로 정유 산업에 발을 들인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유전을 찾아 일확천금을 꿈꾸고 있었지만, 그는 원유를 캐는 쪽보다 원유를 ‘상품’으로 만드는 쪽이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 선택은 훗날 그의 인생 전체를 뒤바꾸는 결정이 된다. 누군가는 가장 뜨거운 현장으로 뛰어들었고, 록펠러는 그 현장을 돌아가며 구조를 장악했다. 그는 ‘캐는 사람‘보다 ‘정제해서 파는 사람’이 되는 길을 택한 셈이다.

1865년 그는 파트너 지분을 인수해 경영권을 확보했고, 이후 헨리 플래글러가 합류하면서 스탠다드 오일로 이어질 뼈대가 완성되기 시작한다. 플래글러는 자금과 물류, 금융 감각을 보탰고, 록펠러는 운영과 통제의 구조를 짰다. 둘의 결합은 단순한 동업이 아니라, 석유산업 전체를 재설계하는 전환점이었다. 클리블랜드의 정유 사업은 그렇게 빠르게 성장했고, 마침내 1870년 하나의 이름 아래 재편된다.

기준이 되겠다는 남자, 이름을 짓다
스탠다드오일 로고
1870년 록펠러는 정유 사업을 법인 형태로 재편하며 회사를 세운다. 이름은 스탠다드 오일 컴퍼니(Standard Oil Company). 이름 그대로 ‘표준’을 자처한 회사였다. 즉흥과 모험, 투기와 혼란이 지배하던 석유판을 제조업처럼 바꾸겠다는 선언이었다. 정유 품질을 표준화하고, 공정을 통일하고, 공급망을 장악하고, 석유를 하나의 체계 속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창립 파트너는 존 D. 록펠러, 헨리 플래글러, 사무엘 앤드루스, 윌리엄 록펠러, 스티븐 하크니스. 초기 자본금은 100만달러였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였지만, 이 회사의 진짜 무기는 자본의 크기보다 자본을 다루는 방식에 있었다. 록펠러는 석유를 팔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석유산업의 ‘표준’을 팔려 했다. 그리고 표준을 장악한 자가 결국 시장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알았다.

기술보단 운영...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다
많은 사람이 거대한 산업 제국을 떠올릴 때 혁신적 발명을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록펠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정유 기술 그 자체보다는 운영능력이었다.

그는 생산 단가를 낮췄다. 불량률을 줄였다. 같은 원유에서 더 많은 등유를 뽑아내는 수율을 높였다. 공정을 통일해 품질의 편차를 줄였다. 버려질 수 있었던 부산물까지 다시 상품으로 만들었다. 재고, 유통, 공급을 하나로 묶어 원가 구조 자체를 바꿔버렸다.

이렇게 되면 경쟁자들은 같은 가격을 맞추기가 어려워진다. 단순히 더 열심히 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미 출발선의 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록펠러는 아예 승부판 자체를 다시 짰다. 누군가 석유를 파는 동안, 그는 공정을 통제했고, 누군가 가격을 고민하는 동안 그는 원가 구조를 바꿨다. 오늘날 제조업과 플랫폼 기업들이 공급망과 물류, 데이터와 규모의 경제를 한 몸처럼 묶어 경쟁하는 것과 닮은 장면이다. 록펠러는 19세기에 이미 그 방식을 먼저 실행한 셈이었다.

스탠다드오일의 정유소
무엇보다 당시 석유산업 수익의 핵심은 운송이었다. 석유는 무겁다. 많이 실어야 하고, 멀리 보내야 돈이 된다. 결국 정유업의 진짜 전장은 공장 안이 아니라 철도 위에도 있었다.

록펠러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냉정하게 이해했다. 그는 막대한 물량을 무기로 펜실베이니아 철도, 뉴욕 센트럴, 이리 철도 같은 주요 철도회사들과 협상해 유리한 운임을 확보하려 했다. 더 많이 보내는 자가 더 낮은 운임을 받는다. 더 낮은 운임은 더 낮은 판매가로 이어지고, 더 낮은 가격은 더 큰 점유율을 만든다. 그리고 더 큰 점유율은 다시 더 강한 협상력을 낳는다.

반면 경쟁사는 철도 운임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정유 공장 안에서 아무리 버텨도, 시장까지 가는 길목에서 이미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그러면 언젠가 자금이 마르고, 가격 경쟁에서 밀리고, 시장에서 흔들리게 된다.

클리블랜드 매서커, 총칼 없는 산업의 학살
1872년 전후 클리블랜드의 정유사들이 대거 스탠다드 오일에 흡수된다. 이를 흔히 클리블랜드 매서커(Cleveland Massacre·클리블랜드 학살자)로 불린다. 이름은 잔혹하지만 방식은 총칼이 아니었다. 가격, 운임, 자금력, 장기전. 스탠다드 오일은 운송 우위와 원가 경쟁력을 바탕으로 가격을 낮출 수 있었고, 경쟁사들은 버티기 어려워졌다. 지치면 스탠다드가 인수에 나섰다. 거절하면 장기전, 수락하면 합병이었다. 바로 이 시기부터 록펠러는 단순한 성공한 사업가가 아니라, 산업을 집어삼키는 독점가의 얼굴로 대중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스탠다드 오일 신탁서류
스탠다드 오일이 ‘독점’이라 불린 이유는 단순히 거대한 회사여서만은 아니다. 진짜 무서웠던 건 독점 구조였다. 미국은 주마다 기업 규제가 달라 여러 주에 걸친 사업을 한 회사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록펠러는 여기서도 또 하나의 해법을 만들어낸다. 바로 트러스트(Trust) 구조다. 겉으로 보면 여러 회사가 따로 존재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소수의 신탁관리자들이 전체를 지배한다. 법적으로는 분산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앙에서 통제되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에 가까웠다.

오늘날 지주회사 구조를 떠올리게 하는 이 시스템 덕분에 스탠다드 오일은 전국 곳곳의 정유, 운송, 판매를 사실상 하나의 몸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때부터 록펠러는 더 이상 근면한 기업가가 아니었다.

그는 ‘너무 성공해버린 사람’, 그래서 결국 제도의 경계까지 밀어붙인 인물로 읽히기 시작했다.

셔먼 반독점법, 세계 첫 독점기업의 해체
산업계의 반감과 정치적 압력은 점점 커졌다.

결국 1890년 미국은 셔먼 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을 제정한다. 독점과 무역 제한을 금지하는 미국 최초의 연방 반독점법이었다. 하지만 법이 생겼다고 해서 스탠다드 오일이 곧장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실제 해체 명령이 내려지기까지는 21년이 더 걸렸다.

록펠러의 독점을 희화하한 그림
법의 기준은 초기엔 모호했고, 스탠다드 오일은 구조를 바꾸며 규제를 피해갔으며, 정치 환경 또한 반독점 기조가 충분히 무르익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1900년대 진보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대기업 규제 여론은 더 강해졌고, 미국 정부는 1906년 본격적으로 스탠다드 오일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그리고 마침내 1911년, 연방대법원은 스탠다드 오일이 경쟁을 부당하게 제한한 독점 기업이라고 판단해 회사를 34개로 분할하라고 명령한다.

록펠러가 평생 쌓아올린 통제의 시스템이 법정에서 분해되는 순간이었다.

해체된 제국, 더 커진 자산의 아이러니
보통 사람들은 제국이 해체되면 황제도 몰락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록펠러는 달랐다. 스탠다드 오일이 해체될 때 그는 이미 쪼개진 기업들의 지분을 상당 부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분할된 회사들이 각자 성장하면서 그 지분 가치가 오히려 더 뛰었다. 제국은 무너졌지만, 자산은 더 커지는 역설로 회사는 쪼개졌지만, 부는 더 증식하는 아이러니였다.

그는 독점의 상징으로 제재를 받았지만, 동시에 그 해체 이후 더 큰 부를 얻은 인물이기도 했다. 자본주의는 때로 제국을 무너뜨리면서도, 황제의 재산까지 함께 없애주지는 않는다.

록펠러와 그의 아들
스탠다드 오일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후손 기업들은 여전히 세계 에너지 산업의 중심에 서 있다. Standard Oil of New Jersey는 훗날 엑슨이 됐고 Standard Oil of New York는 모빙이란 회사가 됐다. 이 둘은 1999년 합병해 오늘의 엑슨 모빌이 됐다.

또 다른 줄기인 Standard Oil of California는 훗날 셰브론으로 이어진다. 즉, 스탠다드 오일은 해체됐지만 그 뿌리는 곳곳에 자리잡고 미국 정유 산업을 이끌어가고 있다. 브랜드는 없어졌지만 산업의 중심부에는 여전히 록펠러의 그림자가 흐른다.

해체 이후의 시대를 오래 본 남자
스탠다드 오일 해체 이후 록펠러는 비교적 조용한 삶을 보냈다.

뉴욕과 플로리다를 오가며 경영 일선에서는 멀어졌지만, 그는 이미 세계사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당시 개인 재산은 약 9억달러 수준으로 평가됐다. 말년의 그는 검소한 습관으로도 유명했다. 어린 시절부터처럼 장부를 기록했고, 절약을 생활화했고, 신앙과 기부를 꾸준히 이어갔다. 동시에 재단을 통한 체계적 자선사업에 힘을 쏟았다. 사업가의 얼굴은 점차 자산가이자 기부가의 얼굴로 이동했다.

스탠다드 오일의 계승도<비주얼캐피탈리스트닷컴>
그리고 1937년 5월 23일, 그는 플로리다 오먼드비치에서 97세로 세상을 떠난다. 스탠다드 오일은 이미 역사 속 이름이 됐지만, 그가 남긴 후손 기업들과 기관들, 그리고 산업의 문법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혁신과 독점의 경계를 넘어간 남자
록펠러의 삶은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수렴한다. 혁신과 독점의 경계는 어디인가. 그의 성공 비밀은 천재적 발명이 아니었다. 유통과 비용, 규모와 공정, 운송과 재고를 하나의 구조로 묶는 운영 능력이었다. 그는 시장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 이해를 너무 완벽하게 밀어붙인 사람이었다. 그 구조는 산업을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경쟁을 질식시켰다. 그는 시장의 문법을 남겼고, 그 문법이 너무 강해졌을 때 국가는 결국 법을 들고 들어왔다.

노년의 록펠러
그래서 록펠러의 이야기는 단지 옛 석유 재벌의 전기가 아니다. 오늘날 빅테크와 플랫폼, 공급망과 물류, 데이터 독점과 시장 지배를 둘러싼 논쟁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누군가가 산업의 질서를 너무 잘 설계했을 때, 우리는 그를 혁신가라 부를 것인가, 독점가라 부를 것인가.

존 D. 록펠러는 그 질문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극적으로 남긴 인물이었다. 그는 석유를 캔 사람이 아니라, 석유가 흐르는 길 전체를 장악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만든 스탠다드 오일은 해체됐지만, 그가 남긴 산업의 설계도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 남아 산업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흥부전]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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