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아래, 함께 쓰러지다

왕실이 탐낸 그림 |
1548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섭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누이였던 헝가리의 마리아는 벨기에 루벤의 한 예배당에 걸린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반드시 가져야겠다고 결심했지만, 대가는 파격적이었습니다. 루벤 지역 십자궁사 길드(Greater Guild of Crossbowmen)에게 미힐 콕시가 정밀하게 제작한 복제화 한 점과 새 오르간을 통째로 안겨주고서야 원본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한 점의 그림이 교회 오르간 한 대 값을 치를만큼이란 건데, 대체 어떤 그림이기에 왕실이 그토록 갈망했던 것일까요?
감정의 화가 |
1399년경, 지금의 벨기에 투르네에서 태어난 로히어르 드 라 파스튀르(Roger de la Pasture, 프랑스식 본명)는 당대 최고의 화가 로베르 캄팽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게 됩니다. 캄팽은 조각처럼 단단한 형태감과 사실적인 인물 묘사로 유명했는데, 젊은 화가는 스승의 기법을 완벽히 흡수하면서도 자신만의 결정적 요소인 '감정'을 더하게 됩니다. 동시대 거장 얀 판 에이크가 보석 같은 정밀함으로 세상의 표면을 포착했다면, 판 데르 베이던은 인간의 내면에 깃든 가장 깊은 슬픔과 연민의 떨림을 캔버스 위로 끌어올리는 데 천재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석궁과 십자가 |
슬픔만을 위한 공간 |
이제 그림을 좀 더 가까이 감상해 봅시다. 가로 262cm, 세로 220cm에 달하는 이 거대한 참나무 패널 위에 거의 실물 크기의 인물 열 명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첫인상은 압도적입니다. 그런데 곧 기이합니다. 배경이 없습니다. 풍경도, 하늘도, 건물도 없이, 금빛이 감도는 얕은 상자 같은 공간 안에 인물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중세 북유럽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나무 조각 제단 같기는 한데, 그러나 조각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 안에 갇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듭니다.
그림과 현실의 경계 |
함께 고통받음 |
하지만, 이 그림에서 가장 도드라진 장면은 예수의 몸이 아닙니다. 그 아래에서 기절하여 쓰러지는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그녀의 자세를 자세히 보십시오.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창백한 얼굴, 아들과 같은 각도로 기울어진 몸, 무력하게 늘어진 팔이 죽은 아들의 자세와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죽은 자의 몸과 살아 있으나 쓰러진 자의 몸이 거울처럼 대칭을 이룹니다.
이걸 보고 있자니, 화가가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구도를 잡은 건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중세 신학에는 'compassio'라는 핵심 개념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com(함께)'과 'passio(고통받음)'가 합쳐진 이 말은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을 넘어 타인의 고통을 자기 몸으로 온전히 겪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들의 죽음을 슬퍼했다'라는 말로는 이 장면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지금 그렇지 않을까요. 억울한 누명으로 아들이 눈앞에서 공개 처형을 당하는 순간, 실신하는 그 모습은 마리아도 역시 아들과 함께 죽음에 이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판 데르 베이던은 이 감정을 시각 언어로 완벽하게 번역해 냅니다. '아들이 죽으니 어머니도 함께 쓰러진다', '사랑하는 이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 된다.' 이 단순하고도 처절한 진리가 두 사람의 평행하는 몸짓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색채 |
색채를 읽어 봅시다. 요한의 선명한 붉은 의복은 사랑과 순교의 열정을, 마리아의 깊고 고요한 푸른색은 천상의 고귀함과 어머니의 슬픔을 동시에 전합니다. 특히 성모의 푸른 옷에 사용된 울트라 마린 안료는 아프가니스탄 바다크샨에서 채굴한 라피스 라줄리 원석을 갈아 만든 것으로 당시 무게 단위로 금보다 비쌌습니다. 의뢰인인 십자궁사 길드가 이 작품에 쏟아부은 재정적 헌신이 안료 하나에서도 드러나는 셈입니다.
전쟁과 복원을 견뎌 낸 590년 |
나는 함께 쓰러질 수 있는가 |
무엇보다도 이 그림은 이렇게 묻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함께 쓰러질 수 있는 사람인가?' 이미 600년 가까이 지났지만, 판 데르 베이던이 화폭에 담아 놓은 'compassio', 함께 고통받음의 장면은 오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림 속 인물들을 다시 보십시오. 부유한 산헤드린 의원이었던 니고데모, 유력한 지도자 아리마대 요셉, 평범한 여인들, 젊은 제자 요한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슬픔을 나눕니다. 신분도, 나이도, 성별도 다른 이들이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모든 차이를 내려놓고 하나의 슬픔 공동체가 됩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는 사회적 지위도 정치적 입장도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이의 고통 앞에 함께 서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말이 떠오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고전 12:26). 이 작품은 그 말씀의 가장 아름다운 설교로 읽힙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시대의 교회를 향한 준엄한 물음으로도 들립니다. 성공과 번영의 서사에 매몰되어 십자가의 본질인 고통받는 이와 함께 아파하는 것을 잊고 있지는 않은지, 프로그램과 숫자의 논리에 갇혀 기절하여 쓰러지는 이웃을 부축하는 요한의 손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마리아의 실신은 나약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극한이 도달하는 곳, 타인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 되는 그 경계 없는 연대의 표현입니다. 판 데르 베이던은 그 순간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채와 형태로 담아냅니다.

최주훈 / 중앙루터교회, <뉴스앤조이> 이사장
최주훈 newsnjoy@newsnjo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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