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파열음… 평화라는 망가진 질서 '28년 후'와 '노 어더 랜드'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2026. 3. 14.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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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의 영화뜰]

[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 2월2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플로리다주 마라라고 리조트에 머무르며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flickr(whitehouse)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각국에서 복지제도가 설계되기 시작한 데에는 '죽음 앞에선 누구도 특별할 수 없다'는 인류의 절절한 경험이 한 몫을 했다. 총탄과 포탄으로 사지가 찢겨 나가고 핵폭탄으로 십수만 명이 흔적조차 없이 녹아내린 충격적인 사건을 목도한 사람들은 세계를 안전하게 재건하고 싶어했다. 전후 질서는 차별 대신 국제협력의 방식으로 설계됐고, 그 토양은 '국경은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믿던 1990~2000년대 세계화 물결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 담론이 힘을 얻던 그 시절 20대를 보낸 이들이 해외 유학과 배낭여행을 자유롭게 누리며 전 세계인과 동시대의 감각을 공유할 수 있었던 맥락이다.

바로 그 세계의 질서가, 이제 곳곳에서 명확한 파열음을 내며 부서지고 있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주권국가의 영토 침략을 원칙적으로 배척해 온 세계 간 약속은 단박에 무너졌다.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을 생포하고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를 사살한 최근의 미국은 한때 세계 평화를 힘으로 강제할 수 있었던 자신들의 패권국 입지가 흔들리고 있음을 요란하게 실토하는 듯하다. 우후죽순 발발하는 각지에서의 충돌과 격전은 인류가 지난 80여 년간 쌓아온 평화라는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고 있다는 명징한 신호로 읽힌다.

그 기류가 영화라는 예술에서도 감지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화가 통상 2~3년 정도의 기획, 제작, 후반작업 과정을 거친 뒤 극장 개봉으로 각국의 관객과 만나는 걸 고려하면, 이들 작품 중에서 최근 수년 사이 들려오는 세계의 파열음을 기민하게 감지하고 녹여낸 사례가 존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장르, 창작자의 인지도, 자본과의 결합 등 영화를 분류하는 수많은 기준에 비춰봤을 때 공통점이 거의 없어 보이는 작품 간에도 세상의 불안한 변화를 바라보는 창작자 나름대로의 엇비슷한 시선이 담겨있다는 점일 것이다.

▲ 영화 '28년 후: 뼈의 사원' 포스터(왼쪽)와 다큐멘터리 영화 '노 어더 랜드' 포스터.

지금 우리 극장가에 상영 중인 상업 좀비영화 '28년 후: 뼈의 사원',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사회파 다큐멘터리 '노 어더 랜드'의 사례도 적절한 예시가 돼 줄 것 같다. 두 작품은 얼핏 보기엔 비슷한 점이 전혀 없어 보인다. '28년 후: 뼈의 사원'은 대니 보일 감독과 알랙스 가랜드 각본가의 저명한 좀비 시리즈 '28일 후'(2003), '28년 후'(2025)의 후속 이야기를 다루는 6300만 달러(한화 약 935억원) 규모의 대형 장르물이고, '노 어더 랜드'는 팔레스타인 활동가와 이스라엘 기자가 2019년부터 2023년까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군의 주택 철거 작전을 직접 촬영한 고발형 기록 다큐멘터리다.

▲ 영화 '28년 후: 뼈의 사원' 스틸컷.

눈여겨봐야 할 것은 두 작품 모두 도덕과 인류애를 상실한 폐허 세계의 잔혹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일 것이다. '28년 후: 뼈의 사원'은 분노바이러스에 물든 인류가 좀비 감염을 막기 위해 장벽을 세워 올린 채 고립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공존의 질서가 사라진 빈틈을 치고 들어온 극단적인 악인들이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며 무자비한 살육을 벌이는 대목에 집중한다. '노 어더 랜드' 속 이스라엘 군인은 몇 대에 걸쳐 형성된 팔레스타인 마을의 집을 각종 법을 명분 삼아 끊임없이 부숴대고, 거처를 빼앗긴 채 초토화된 일상을 받아 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동굴로 피신하다 기어코 극단적이고 반인륜적인 복수에 이른다. 2023년 10월 낙하산을 타고 국경을 넘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인을 납치, 살해한 바로 그 사건이다.

▲ 다큐멘터리 영화 '노 어더 랜드' 스틸컷.

두 작품이 관찰한 것은 결국 '망가져 가는 질서'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평화라는 기존 세계의 법칙이 완전히 붕괴된 현실을 직시하는 창작자들의 시선으로도 읽힐 수 있다. '죽음 앞에선 누구도 특별할 수 없다'던 인식, '그러므로 인간은 서로를 배척하는 대신 공생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지난 입장은 이제 폐기된 것이다. 영화들은 모두 곧 닥쳐올 앞날에서도 별다른 희망을 찾아내기 어렵다는 비관으로 끝을 맺는다. 이 암담한 결말이 지금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전 세계 전쟁 뉴스의 “대대적 공습”, “초등학생 폭사”와 같은 언어와 맞물려 떨어질 때, 한 시절을 세계시민으로 살아온 평범한 관객들은 가슴 한편이 묵직하게 옥죄어지는 경험을 피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던 세계는 이렇게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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