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에 잘 대처하지 못해 자책하는 당신에게

민바람 2026. 3. 14.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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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되는 이야기] 성폭력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내 인생의 목표 중 하나는 (중략) ‘내 내면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짐으로써 다가오는 침입자에 맞서서 훌륭한 문지기가 되는 것. 최소한 “왜 그런 걸 묻죠?”라고 재깍 되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의 저서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김명남 옮김, 창비, 2017)에서 이 부분을 읽었을 때 크게 위안받았다. 세상에, 저명한 여권운동가 리베카 솔닛도 이런 목표를 가지고 사는구나. 내가 살아오며 그렇게 많은 성폭력을 겪고도 매번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처럼.

내게는 좋지 않은 습관이 있다. 불쾌함, 분노 등의 감정을 나도 모르게 억압하는 습관. 그 순간에는 내 진짜 기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가고 나중에서야 문득 깨닫는다. 억압된 감정은 그냥 사라지지 않았다. 잠들기 전에도, 잠에서 깬 새벽에도 수면 위로 올라와 가슴을 치게 만들었고,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씩 나를 괴롭히곤 했다.

심리상담을 받을 때 오랜 시간 이 문제를 다뤘다. 혼자 화를 내고 욕하는 연습도 해보았다. 평소 성폭력 대처법을 알려주는 책을 읽으며, 성폭력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을 머리로 연습해 보기도 했다. 그래픽 북 『악어 프로젝트』와 별책부록에 실린 내용인데, ‘일반적인 상식을 동원해 말하기, 상대의 말을 기록하기, 뜬금없는 말 던지기, 단호하게 거절하기,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기, 자리 뜨기’ 등 여러 방법을 조언했다. 하지만,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때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폭력과 성차별. 그리고 대처법을 다양한 에피소드로 풀어낸 그래픽 북 『악어 프로젝트』와 별책부록(토마스 마티외 저, 맹슬기 역, 푸른지식, 2016)

성희롱을 제지시킨 경험

그런 내가 전에 비해 크게 성장했다고 느낀 일이 있었다. 오랜 친분이 있는 직장 상사와 식사를 할 때였는데, 그가 자꾸만 이런 질문들을 늘어놓았다.

“너는 대체 왜 남자를 안 사귀는 거냐?”

“너랑 사는 동거인, 사실은 남자 아니야?”

“내가 가정방문 한번 해야되는데.”

점점 불쾌감이 쌓여갔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요?”, “아니거든요.”, “여자들 사는 집에 팀장님이 왜 오세요.” 정도로 받아넘기며 참고 있었다. 앞으로도 봐야 하는 사이에서 분위기나 관계가 어색해질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어진 어느 순간, 이건 절대 그냥 넘길 상황이 아니라는 느낌이 훅 들어왔다.

“자꾸 다가오면 ‘뽀뽀’ 된다.”

식당은 무척 시끄러웠고, 그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내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그가 웃으며 뱉은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불편해요.”

그는 당황한 듯 얼버무렸고 대화는 흘러갔지만, 그것만으로는 내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자리를 정리하기 전 다시 말을 꺼냈다.

“아까 그 말씀은 성희롱에 해당해요. 앞으로 그런 말을 하시면 저는 같이 일을 못할 것 같아요. 남자친구나 결혼 얘기도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잠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할 말을 찾더니 “알았다”고 말했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성희롱을 당한 것이었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전처럼 뒤늦은 분노로 속을 끓이지 않았다. 오히려 곧바로 ‘불편하다’는 감정을 표현하고, 상대의 말이 성폭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짚고, 재발방지 약속까지 받은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사과를 받았다면 더 좋았겠으나, 내게 무척 중요한 일터였기에 일과 관계에 문제가 없도록 마무리하는 편을 택했다.

 

나의 대응은 퇴보한 걸까

하지만 대응 능력은 직선형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직장 상사와의 일이 있고 몇 달 뒤의 일이다. 편의점에서 근무 중인 내게 70대 남자 단골손님이 이런 말을 던졌다.

“성이 어떻게 돼? 미스 김? 미스 리?”

급습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선 넘는 언행으로 나를 불쾌하게 했던 손님이라, 이 손님이 오면 나는 재고를 두는 창고로 피해 있다가 굳은 표정과 말투로 결제만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경계심을 놓친 상태였다. 평소보다 부드러운 태도를 느꼈는지 그 틈을 타 그가 다시 사적인 질문을 해왔고, 나는 “왜요…? 모르셔도 될 것 같은데….” 하면서 애매하게 웃고 말았다. 그는 내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따라웃었다.

그가 나간 뒤에야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남자에게라면 굳이 하지 않았을 법한 질문이었고, ‘미스 김, 미스 리‘라는 말은 나를 직원이 아닌 이성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권력 아래 있는 사람으로 대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내가 진작에 확실히 경고했다면 같은 사람에게 몇 번이나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텐데.’

▲ 내가 근무하는 편의점 점포에 붙어있는 성희롱 관련 안내문

처음에 그는 대뜸 내게 결혼했는지 물으며 밥을 사 주겠다고 했고, 두 번째는 가게에서 파는 상품을 선물하려 했다. 나는 적당한 말로 선을 그었지만, 다음에도 그는 어떤 맥락 없이 ‘요트를 태워주겠다’는 말을 던졌다. 다행히 그때 나는 모든 성의가 사라진 눈빛과 “전혀 관심이 없네요.”라는 일관된 반응으로 쉽게 그를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이렇게 공격을 받고 보니 그때 너무 무르게 대응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한편, 내게 성을 물은 말이 성희롱이 맞는지 헷갈리기도 했다. 성폭력 전문 상담사에게 전화로 문의하니 상담사는 “전에 있었던 상황들까지 들으면 성희롱이 맞다”고 말했다. 내 고통이 과장된 게 아니라는 상담사의 위로를 듣자 서러운 마음이 올라왔다. 도대체 얼마나 더 노력해야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걸까? 무능력한 자신으로 자꾸 되돌아가는 기분에 울먹이며 물었다.

“저는 왜 이렇게도 안 바뀌는 걸까요…?”

 

완벽하게 대처하지 못해도 괜찮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자신의 감정과 만나기 위해서 몸 안에 있는 감각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안내한다. 먼저 몸이 말하려는 메시지의 독해법을 스스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불편감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목이 죄어들고, 떨리고, 위가 꼬이고, 호흡이 가빠지고, 눈가가 젖어들고, 다리 사이에 땀이 차고, 가슴이 따뜻해지고, 마음이 충만해지고, 손을 안절부절못하는” 그 느낌에 집중해야 한다.

내 경우를 돌아보면, 성희롱 가해자 손님의 성희롱 발언을 들을 때 가슴이 짓눌리고 목구멍이 답답해지며 뒷목과 어깨 근육이 긴장하는 느낌, 얼굴과 머리로 피가 몰리는 느낌이 있었다. 분명한 신체적 신호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신체감각 신호를 따르지 못했던 것이 그 신호에 무뎌서만은 아니었다. 성폭력의 모습은 무척 다양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피해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애매한 공격도 많다. 또한 자신에게 중요한 관계 속에서 겪는 성폭력의 경우, 자신의 감각과 감정을 바로 인지하고 대응 방법을 결정하기 어려울 수 있다.

성폭력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온라인에 연재하는 류이현 작가는 성폭력이 매번 새로운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는 점을 지적하며, “성폭력을 하나의 단일한 범죄로 묶어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고 단순한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어릴 적 교통사고를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청소년 때 깡패를 만나지 말라는 법이 있나? 교통사고를 당하고 깡패한테 삥을 뜯긴 적이 있다고 해서 오래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지 말라는 법 있나? 교통사고를 당하고 깡패에게 삥을 뜯기고 오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봤다고 해서 길거리의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지 말라는 법 있나?” 

그리고 “첫 번째 피해가 피해자의 탓이 아니듯, 또 다른 피해를 입는다고 해도 절대 피해자의 탓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내게 가장 스트레스가 되었던 것은 이후 그 손님이 오지 않은 한 달이었다. 나는 지난 무례들을 야무지게 따지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벼르고 있자니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동안 이런 생각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간의 일을 전부 따져 물을까, 짧고 정중하게 경고만 해야 할까? 사과를 요구할까? 일을 키워 사장님께 폐가 되진 않을까?

고민 끝에 상담사의 조언에 따라 짧고 단순한 메시지를 전하기로 했다. 할 말을 적어 외우고 연습했다. 또 한 번 만족스럽지 않은 대응을 할 경우 오래 자책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언제 그가 나타날지 몰라서 일할 때는 늘 긴장 상태였고, 잠자리에서도 편히 자기 어려웠다.

마침내 그 손님이 다시 왔을 때, 비장한 각오로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사장님이 연락처 달라고 하셨습니다. 계속 사적인 질문들을 해서 힘들다고 말씀드렸거든요.

그는 무척 당황한 얼굴로 목소리에 힘을 잔뜩 주고 외쳤다.

“그걸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아가씨가 친절하니까 고마워서…”

그때 나는 계산대에서 나와 그 손님 앞에 섰다. 직원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건 손님 생각이고, 상대방 생각을 하셔야죠. 그동안 계속 참았는데, 제가 손님하고 밥을 왜 먹으며, 요트를 왜 탑니까? 앞으로 그러지 마세요.”

그는 몇 차례 더 변명을 했지만, 뒤에 손님이 들어오자 “알겠습니다. 미안해요. 미안합니다.”하고 서둘러 점포를 빠져나갔다.

편의점에서 근무하는 내게 여러 번 성희롱 발언을 했던 남성 손님에게 할 말을 준비해서 드디어 단호하게 말하고 사과를 받은 날. 이날의 성공을 기억하라며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가 그려준 그림.

그날 이후 그는 다시 오지 않았고, 나는 마침내 편안히 잠들 수 있게 되었다. 해피엔딩이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일 내가 생각만큼 할 말을 잘하지 못했다면, 그 손님이 더 비협조적으로 반응했다면, 또는 아랑곳없이 다시 찾아와 성희롱을 반복했다면… 나는 그래도 나 자신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었을까?

그동안 지나친 마음고생을 했던 자신에게 이제는 수시로 말해준다.

‘완벽하게 대처하지 못해도 괜찮아. 너는 수많은 성폭력 속을 뚫고 이번 생을 살아내는 것만으로 위대한 거야.’

기울어진 사회구조 속에서 성폭력은 계속된다. 피해자 혼자의 힘으로 성폭력을 다 막을 수 없다. 그것은 결코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왜 상처를 감당하기에도 벅찬 피해자들만 자신을 지키는 능력을 키우려 애를 쓰며 자책까지 해야 하는가.

 

[필자 소개] 민바람. 자신의 경험으로 사회 구조를 비추는 글을 쓴다. 퀴어, 여성, 신경다양성, 빈곤, 지역 문제의 교차성 탐구에 관심이 많다. 『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2025년 재출간), 『낱말의 장면들』(2023) 등을 출간 후, 퀴어 소설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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