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통해 영화의 역할을 말하는 방법, '센티멘탈 밸류'
[리뷰] 요아킴 트리에 감독 영화 '센티멘탈 밸류'
[미디어오늘 윤유경 기자]

※이 리뷰에는 영화 '센티멘탈 밸류'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누구에게인진 모르겠지만 소리를 내서 말했어요. 도와주세요. 더 이상 못 하겠어요. 혼자서는 못해요. 나에겐 집이 필요해요.” 영화감독인 아빠 구스타프(스텔란 스카스가드)가 쓴 이 대사는 딸 노라(레나테 레인스베)의 마음을 처음으로 관통한다. 계속해 엇나가기만 하던 둘 사이에 소통이 이뤄진 순간이자, 주인공이 되어달라는 아빠의 출연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던 노라가 영화에 함께하기로 마음 먹은 순간이다.
사실 구스타프는 처음부터 연극배우인 노라를 위해 이 시나리오를 썼다. 오래 전 이혼 후 집을 떠났던 구스타프는 아내가 죽은 후 추모식에 등장한다. 어린 시절 갑자기 떠나버린 아빠에 대한 상처가 컸던 노라에게 구스타프는 대뜸 “널 위해 쓴 거야”라며 영화 대본을 건넨다. '아빠와 같이 일할 수 없다'며 대본을 읽지도 않고 떠나지만, 동생 아그네스(잉가 입스도테르 릴레오스)의 노력으로 시나리오를 읽게 된 노라는 결국 눈물을 보인다.
이렇듯 영화 '센티멘탈 밸류'는 영화, 즉 예술이라는 매개체로 흘러간다. 50주년 회고전을 열 만큼 거장 감독인 구스타프는 정작 가족과의 소통에 있어서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 그에게 영화란 삶의 전부이자 소통의 도구다. 어린 아그네스를 본인 영화에 출연시킨 경험은 '최고의 순간'이었고, 아그네스의 아들인 손자 에리크 또한 노라와 함께 영화에 출연시킨다. 에리크에겐 옛날 DVD를 선물하며 세상을 이해하게 될 거라 말한다.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겪으며 살아가는 첫째 딸 노라와 대화를 시도하는 수단 역시 영화다. 구스타프의 엄마 카린은 저항군을 돕다가 나치에게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고선 결국 구스타프가 7살이었을 무렵 스스로 세상을 떠난다. 어릴 적 아빠가 떠나고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짊어져야만 했던 노라도 마음을 치유하지 못한 채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엄마가 죽은 후 구스타프를 위로한 건 영화였다. 그렇기에 그는 엄마와 딸을 엮어낸 이야기를 만들고, 딸에게 주인공을 제안하며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려 한다. 그리곤 노라에게 “네가 힘들었다는 거 알아. 네 안에서 내가 보여. 근데 분노가 가득 차면 사랑 받을 수 없어”라며 자신에게, 딸에게, 동시에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한다.
노라가 연극만을 고집해 온 점도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회피하고자 하는 내면을 보여준다. 노라는 “다른 사람이 돼 감정을 느끼면 내 감정도 느낄 수 있다”며 연극이 좋다고 말하지만, 막상 무대에 서기 직전엔 과도한 불안에 휩싸인다. 꽉 쪼인 의상을 제 손으로 찢기도 하고, 귀 옆에 걸린 마이크를 느슨하게 해달라고 반복해 요청한다. 본래 직접 쓴 에세이로 배우 오디션을 보려고 했던 노라가 흔하고도 유명한 작품 '갈매기'를 고르며 타인의 이야기로 배우 생활을 시작한 것도 이와 맞닿아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아빠의 영화에 출연하며 비로소 '내 이야기'로 돌아오게 된 노라의 얼굴은 훨씬 편안해 보인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매개체는 '집'이다. 고조할아버지부터 6대에 걸친 가족이 살아온 집에는 개인의 삶과 역사가 축적돼 있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가벼워지고 침묵으로 채워지지만, 단절됐던 가족의 소통이 이뤄지는 곳은 언제나 집이다. 구스타프는 가족이 살던 집에서 가족의 이야기로 채운 영화를 촬영하기로 한다. 집을 새롭게 본뜬 세트장에서 아빠와 딸, 손자까지 가족은 다시 연결된다. 우울함에 잠식된 언니를 찾아간 아그네스가 언니로 하여금 아빠의 시나리오를 읽게 하고, 함께 과거를 마주하는 곳 역시 노라의 집이다.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왜 너는 망가지지 않았어?”라고 묻는 노라에게 아그네스는 “난 언니가 있었잖아”라고 대답한다. 동생을 돌봤던 언니를, 이젠 다시 동생이 돌본다. 동생은 더러워진 언니의 집을 정리하고 자매는 가족에 남은 균열을 치유해 나간다.

영화가 미디어의 시대적 변화를 드러낸 점도 흥미롭다. 출연을 거부한 딸 대신 할리우드 배우 레이첼 캠프(엘르 패닝)를 섭외하게 된 구스타프가 제작팀과 함께 넷플릭스 가판대 앞에서 사진을 찍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영화에선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현실과는 정확히 일치하는 장면이다. 이어진 인터뷰에서 “넷플릭스 제작 작품인데 극장에서도 상영되냐”고 묻는 질문을 받자, 구스타프는 “그럼 영화를 어디서 보냐”며 버럭 화를 낸다. 그는 “틱톡 어그로꾼”이라며 비아냥대지만 넷플릭스의 투자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종종 구스타프는 “나도 이제 늙고 지쳤다”며 전과 달리 통제되지 않는 영화계 시스템이 적응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통제할 수 없지만 받아들여야만 하는 변화는 개인에게도, 예술에도 적용된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삶은 서로 중첩돼 있다. 영화 중반부 구스타프, 노라, 아그네스의 얼굴을 번갈아서 보여주는 초현실적인 장면은 감독이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인물에 이입한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 타인의 삶, 곧 자신의 삶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기도 한다. 영화라는 도구로 영화의 역할을 말하고 실현하는 작품. '센티멘탈 밸류'을 통해 누구든 스스로 삶의 '센티멘탈 밸류'(Sentimental Value, 감정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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