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수갑 50개를 준비해 연회를 열었다, 목표는 한간 두목들이었다
일본 패망 뒤 첫 과제는 베이징 일망타진
위장 연회장에 특무요원들이 들이닥쳤다


한간(漢奸)의 원래 의미는 한족(漢族)을 배신한 반역자였다. 정의(定義)는 들쑥날쑥,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했다. 한(漢)왕조 시절엔 간신을 한간이라 무시하며 쑥덕거렸다.
명(明) 황실은 소수민족에 신경을 썼다. 충칭(重慶), 쓰촨(四川), 구이저우(貴州), 윈난(雲南), 티벳자치구 등 지금의 서남 지구에서 불법행위 한 한족을 지칭했다.
청(淸)대, 건륭제(乾隆帝)는 한족 문화를 숭상했다. 한간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한족이 아니면, 무슨 민족이건 한간으로 분류해버렸다. 황실에 대한 소수민족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어느 시대 건 술 취하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얼큰한 김에 "만주족 주제에 한족 흉내 낸다"며 황실 비난하다 목 날아간 한간이 부지기수였다.
19세기 중엽 서구 열강이 중국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한간의 함의(含意)에 변화가 생겼다. "국가를 배반하고 양인(洋人)들 위해 정보를 수집해 제공하고, 적과 내통해 중국의 이익에 손해를 끼친 중국인"을 한간으로 규정했다.

청나라 말기 혁명파와 개혁파가 깃발을 올렸다. 쑨원(孫文)이 일본에서 조직한 동맹회는 무장혁명을 주장했다. 개혁을 통해 만주족이 세운 청 황실 유지를 도모한 대유(大儒)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 등 개혁파를 한간으로 매도하며 깎아내렸다.
한간이라는 어휘가 법률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까지는 한 화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중·일전쟁 초기, 1938년 11월 2일, 동남아 화교 영수 천자겅(陳嘉庚)이 전시수도 충칭의 국민당기관지에 한간국적론(漢奸國賊論)을 기고했다. "왜적을 우리 국토에서 쫓아내기 전에 저들과 평화와 화합을 입에 올리는 놈들은 나라를 팔아먹는 도둑놈들이다. 정부는 국적(國賊) 응징에 관한 법 제정을 서둘러 줄 것을 제안한다."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蔣介石)가 무릎을 치며 한마디 했다. "한간은 일본이 키우는 돼지와 같다. 살이 찌면 주인에게 잡아 먹힌다. 어차피 일본에 잡아 먹힐 놈들이지만 후세를 위해 법률을 만들어라." 징치한간조례(懲治漢奸條例)가 국회 격인 국민참정회를 통과하자 명 언론인 저우다오펀(鄒稻奮)이 천자겅의 제의를 극찬했다. "동서고금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안이다."
한간들은 서로를 무시했다. 일본 군부가 지금의 베이징(당시는 베이핑), 텐진, 허베이(河北)성, 산시(山西)성, 내몽골자치구에 세운 화베이(華北) 괴뢰(僞)정부 위원장 왕커민(王克敏)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국민당 2인자 왕징웨이(汪精衛)가 일본과 평화협상 하겠다는 명분 내걸고 수립한 난징 괴뢰정부에 흡수된 후에도 왕을 우습게 봤다. "내가 너보다 먼저 일본에 투항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1945년 7월에 들어서자 중국은 승리를 확신했다. 세계 최대규모의 정보기관인 국민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이 장차 법정에 세울 한간 명단 작성에 들어갔다. 결과가 경악할 정도였다. 1958년 전 군통 고위간부가 타이베이에서 구술을 남겼다. "저명 한간 대부분이 한때 당과 정계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었다. 국민당 중앙위원도 20명이 넘었다. 군은 좀 복잡했다. 중일전쟁 초기 괴뢰군(僞軍)은 7만8000명이었다. 왕징웨이가 일본에 투항한 후에도 14만5000에 불과했다. 전쟁 끝 무렵엔 146만에 달했다. 경찰도 40만을 웃돌았다. 만주국 군경까지 포함하면 중국에 들어온 일본군의 3배, 300만 이상이었다."

다이리는 베이핑에 군통 지부를 설치하고 화베이 괴뢰정부 재정을 담당했던 왕스징(汪時璟)을 만났다. 왕은 1927년, 장제스가 북벌군 사령관 시절 거액의 군자금을 지원한 인연이 있었다. 다이리는 왕을 안심시켰다. "위원장은 너와의 옛정을 잊은 적이 없다. 다시 국가에 공을 세울 기회 만들어 주라고 내게 지시했다" 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화베이 지구 한간 두목 50명 명단이다. 네 집에 연회를 준비하고 내가 서명한 초청장을 보내라. 국민정부에 충성하라는 위원장의 뜻을 내가 직접 전달하겠다."
장제스의 심복 다이리의 초청을 주저할 한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2월 5일 해질 무렵 왕스징의 집에 나타난 한간들은 "지난 수년간 지역의 질서유지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는 다이리의 치사에 감동했다. 술이 세 순배 돌자 다이리가 술잔을 식탁에 내리쳤다. 쾅 소리와 함께 연회장에 정적이 감돌았다. 다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 한 장을 꺼내자 문을 박차고 들어온 무장 특무요원들이 연회장을 봉쇄했다. "연회를 위해 수갑 50개를 준비했다. 국민정부를 대표해 체포할 한간 명단을 발표한다."
베이핑 한간 일망타진을 계기로 전국에 한간 검거의 막이 올랐다.
김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