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700리 작은 섬, 단종의 수심에 잠기다

김홍준 2026. 3. 14.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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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남’으로 인기…단종 유배지 청령포
서강이 삼면으로 휘돌아 흐르니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고 서쪽엔 80m 높이의 절벽 육륙봉이 우뚝 솟아 있다. 그래서 단종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는 천연 감옥이라고도 불린다. 김홍준 기자
#scene 1
단종(박지훈): 회한 어린 눈빛으로 한명회(유지태)에게. “나는 이제 어디로 갑니까….”

1457년 6월 22일(양력 7월 13일). 노산군(魯山君)으로 신분이 강등된 단종은 유배길로 떠밀렸다. 한양에서 강원도 영월 청령포까지 700리(275㎞)였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관객 1200만 명을 넘었다. 영화는 단종의 청령포 생활을 허구로 그린다. 단종의 ‘청령포 직전, 청령포 직후’는 어땠을까. 영화 속 대사를 통해 단종의 흔적을 따라가 봤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scene 2
궁녀 매화(전미도): 서강에 빠진 단종에게 “전하!”

영화에선 소나기재 밑 강물에 단종이 빠지는 장면을 연출했다. 단종은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을 했지만 영화는 이 고개 밑, 강 건너편을 유배지로 설정했다. 단종은 실제 유배길에서 한양에서 청령포로 향하는 마지막 고개인 소나기재에 다다랐다. 당시 단종은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까. 『단종의 비애, 세종의 눈물』을 쓴 유동완 작가는 “단종 유배길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정사나 야사에 없지만 정황과 지명 설화를 통해 행로를 가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영화처럼 벚꽃 흐드러진 봄이 아니라 극심한 가뭄 속 한여름이었다. 무더위에 세조가 고을 수령들이 단종에게 얼음을 바치게 명할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은 ‘노산군이 영월로 떠나가니 임금이 환관 안노에게 명하여 화양정에서 전송하게 하였다’(세조 3년 6월 22일) ‘내시부 우승직 김정을 보내어 노산군에게 문안하였다’(세조 3년 6월 23일)고 적혀 있다. 이는 단종이 화양정(서울 광진구 화양동)을 거쳐 어디선가 하루 묵었다는 뜻이다. 근처 자양동에 태종의 행궁이 있었으니 그곳이 유력하다.

이후 단종의 소식은 열흘 넘게 뚝 끊긴다. 실록엔 7월 5일에야 세조가 ‘노산군의 비용을 곡진히 마련할 것을 강원도 관찰사에게 명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 작가는 “단종은 광나루에서 배를 이용해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던 것으로 보인다”며 “물길을 이용한 이유는 단종의 행로를 백성들에게 최대한 노출하지 않으려는 세조의 의도가 개입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영화엔 단종이 유배길에 오를 때 백성들이 통곡하는 장면도 나온다. 물길을 이용한 단종은 가뭄으로 수심이 얕아지자 뭍으로 올라왔다. 행치·어수정·군등치·단정 등 현재 남아 있는 명칭이 청령포까지 점점이 이어지는 게 단서다.

청령포로 가려면 소나기재보다 밋밋한 강 건너편이 낫기에 유배길의 단종은 ‘영화 속 청령포’ 자리에 섰을 것이다. 70m 우뚝 선 바위 ‘선돌’을 바라본 뒤 ‘진짜 청령포’에 들어갔을 것이다. 지난 12일 세종시에서 왔다는 홍슬아(35)씨는 “여기 소나기재에서 내려다보니 영화 속 단종의 아득한 눈매가 떠오른다”고 했다.

강원도 영월군 소나기재 선돌. 김홍준 기자
#scene 3
한명회: 측근들에게 “잊지 마시오, 금성대군이 노산 지척에 있다는 것을.”

민심은 불안했다. 『동각잡기』는 ‘왕은 어렸고, 대군은 강성하다’고 전한다. 수양대군은 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늘 경계했다. 유 작가는 “안평은 사대부들이 좋아할 만한 시서화에 능했고, 금성은 베풀기를 좋아해 사람들이 따랐다”고 전했다.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이 먼저 손을 썼다. 계유정난(1453년, 단종 1년 10월 10일). 영의정 김종서가 사라졌다. 안평은 사약을 받들고 죽었다. 금성만 남았다. 하지만 수양과 신숙주 등의 탄핵에 못 이겨 단종은 금성을 순흥(경북 영주)으로 유배 보냈다.

‘경상도 관노 이동이 금성대군의 모반을 아뢰다.’ 단종이 유배길에 오른 직후 실록(세조 3년 6월 27일)은 금성의 역모설로 들끓는 조정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켰다는 거였다. 그러나 실록(세조 3년 10월 15일)에서도 ‘오합지중’이라 썼듯 새 왕을 갈아치울 병력이나 지략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순흥에도 피바람이 불었다. 정축지변이었다.

#scene4
금부도사 왕방연(백도겸): 울면서 “죄인을 끌어내라.”

영화엔 왕방연이 두 번 등장한다. 단종이 청령포로 건너다 물에 빠졌을 때와 이 장면, 사약을 갖고 내려왔을 때다. 그런데 실제로 유배길 호위 무사는 어득해다. ‘왕방연의 행적에 의문을 품은 안학모 영월문화원장은 그가 사약 집행인이고, 호송 책임자는 어득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1985년 5월 28일자 중앙일보 기사다.

단종이 생을 마감한 곳은 청령포가 아니다. 홍수를 피해 옮긴 관풍헌이다. ‘노산군이…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세조 3년 10월 21일) 실록은 금성대군과 단종이 같은 날 사망했음을 알리고 있다. 청령포와 순흥은 불과 125리(50㎞) 떨어져 있지만 둘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둘 사이의 고개 고치령(770m)보다 높은 시대의 벽이 있었다.

영월군에 위치한 단종의 능인 장릉. 김홍준 기자
#scene5
엄흥도(유해진): 주저하면서 “이제 그만 강을 건너야 할 때이옵니다.”

유 작가는 “실록은 유배길의 단종에 대한 세조의 선처를 부각하고 단종의 나약함을 부각시키려 한 듯 앞뒤 자르고 목을 맸다고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실록과 다른 기록도 있다.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 하였다. 통인(通引·관아의 잔심부름꾼) 하나가…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때 단종은 17세였다.’(연려실기술)

문헌설화는 이처럼 단종의 타살에 방점을 둔다. 이는 숙종실록(숙종 25년 1월 2일)이나 『영월군지』에도 흡사하게 나온다. 반면 구비설화는 ‘스스로 목숨 끊음’을 강조한다. ‘신하가 차마 사약을 바칠 수 없어 청령포 앞 물에 버리고 그 물에 몸을 던졌다. 단종이 이러다 신하가 다 죽을 것 같다며 목에 올가미를 걸고 부엌데기에게 잡아당기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타살엔 권력에 대한 비판이, 자살엔 단종의 의연함과 애도가 담겨 있다. 영화는 후자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청령포는 지금 인산인해다. 평년보다 5배 많은 인파가 몰리고 있다. 청령포 얕은 물에서 단종은 헤어나오지 못했지만, 이렇게 우리에게 살아 있다. ‘옥체가 강물에 둥둥 떠서 돌다가 다시 돌아오고는 했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물 위에 떠 있었다.’(연려실기술)

영월=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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