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 장기판 사라지자… 낙원상가로 간 ‘세대 갈등’
낙원상가 1층 문화놀이터로 몰려
익선동 상인들 “젊은층이 싫어해”
노인들 “우린 갈데 없는데 어쩌나”

“좋아서 오는 게 아녀. 갈 곳이 없으니 찾는 거지.”
10일 오전 9시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1층 앞. 나이가 지긋한 10여 명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종로구청이 운영하는 ‘탑골 어르신 문화놀이터’를 찾은 노인들이었다. 문화놀이터가 문을 열려면 1시간이 남았지만 좌석이 34석밖에 안 돼 ‘오픈런(문 열기 전 줄 서는 것)’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집에서 챙겨 온 장기판을 바닥에 펼쳐 놓고 문화놀이터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서울 은평구 집에서 지하철로 1시간을 달려왔다는 안모(88)씨는 “할 일이 없으니 이곳저곳 오가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한국이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가 넘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면서 노인들의 ‘머물 권리’를 둘러싼 갈등이 커지고 있다. 전국 기초자치단체들과 경찰이 경관 정비 등을 이유로 공원에서 ‘장기·바둑 금지령’을 내리거나 노인들이 자주 모이는 벤치나 천막 등을 철거하자 갈 곳 잃은 노인들이 인근 상가나 지하도 등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이 과정에서 청년층이나 상인들과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노인들의 성지(聖地)’로 불리는 탑골공원. 원래 이곳 외곽엔 북문 담벼락을 따라 장기판 20여 개가 놓여 있었다. 낮에는 ‘내기 장기’, 밤에는 ‘음주 장기’ 판이 이어졌다. 112 신고와 주민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종로구청은 작년 7월 탑골공원 내에서 장기와 바둑을 못 하게 했다. 장기판이 있던 자리엔 ‘공원 내 관람 분위기를 저해하는 장기 등 오락 행위 등은 모두 금지됩니다’라고 쓴 표지판도 세웠다. 대신 노인들이 편하게 머물 수 있도록 지난달 초 낙원상가 1층에 어르신 놀이터를 만들었다. 약 66㎡(20평) 남짓한 놀이터에 하루 평균 200여 명이 찾고 있다.
그런데 얼마 지나 낙원상가 일부 상인들이 불편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낙원상가 근처엔 젊은 층 유동 인구가 늘고 있는 익선동 상권이 형성돼 있다. 악기상 등이 입점한 낙원상가도 익선동 등을 찾는 청년 고객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런데 상가에 노인들이 머물면 청년 상대 장사에 도움이 안 된다고 불만을 제기하고 나온 것이다. 피아노 가게 사장 이모(60)씨는 “노인들의 여가 공간이 필요하다는 취지는 이해한다”면서도 “일부 노인이 위층 상가 복도나 계단에 오래 머물면 젊은 손님이 들어오려다 나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인천 중구 자유공원도 공원 안에 있던 구멍가게와 화단 등을 최근 몇 년에 걸쳐 철거했다. 구멍가게는 노인들이 평소 간식을 사러 자주 들른 곳이었다. 화단에선 노인들이 술판을 벌였다. 지난 8일 이 공원을 찾았더니 노인들은 “20년 전에도 공원 옆에 있는 노인 쉼터가 사라지면서 공원으로 피난 왔는데 또다시 밀려나게 됐다”고 했다. 공원에서 밀려난 노인들은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지하상가를 찾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하상가에서 공인중개사를 하는 김모(61)씨는 “불경기에 어르신들이 물건은 사지 않고 구경만 하니까 상인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구 중구 경상감영공원에서도 지난 몇 년간 공원 내 음주·도박 단속이 강화됐다. 그러자 공원을 놀이터 삼았던 노인들은 걸어서 2분 거리에 있는 중앙로 지하상가 등으로 몰리고 있다. 그런데 일부 노인이 노상 방뇨를 하거나 청년들과 말싸움을 벌여 경찰이 출동하는 일이 이어지면서 상인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일대 상인들은 “노인들이 상가 쪽으로 넘어와 장사에 방해가 되고 있다”고 했다.
세대 갈등은 최근 전국에서 우후죽순 들어서는 파크골프장을 두고도 불거지고 있다. 파크골프는 중장년층 사이에서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젊은 층은 “특정 연령대만을 위한 공간을 왜 짓느냐” “가족이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든다”고 항의하고 있다.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가 전국 성인 7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지난달 발표한 사회 갈등 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71.8%는 “세대 간 갈등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노년층 비율이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세대 간 눈치를 보지 않고 머물 수 있는 노인 여가 공간을 정부와 지자체가 도시 계획 차원에서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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