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노래 ‘부용산’과 목포 항도공립여자중학교(중) [남도 학교기행]

#목포여자고등학교 교명 변천사
근대교육이 시작된 이후로 학교마다 교명 변경이 잦았다. 세계적으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일제 강점으로 역사 왜곡은 물론 교육의 본질도 크게 훼손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교명의 강제 변경 흔적은 마치 상처처럼 남아 있다. 민족교육과 인간 중심의 창의성 교육은 혹독한 탄압을 받거나 멸실되고 말았다. 그 자리는 제국을 위해 충실할 신민 양성, 통제 교육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압제와 탄압, 절망 속에서도 저항적, 투쟁적 교육활동을 펼쳤던 선배 교육자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상> 편에 언급하였던 목포항도공립여자중학교는 현재 목포시 상동 양을산 들머리에 위치한 목포항도여자중학교(1979년 개교)와는 별개의 학교이다. 한때 교명이 목포정명공립여자중학교이기도 했지만, 현재의 목포 정명여자중학교와도 다른 학교이다.

1947년 9월 정명여자중학교가 약 10년 만에 재개교하면서 교명 반환을 요구하자 목포항도공립여자중학교로 변경하였다. 이 교명은 1951년까지 4년간 유지되었다. 학교와 교명을 반환하면서 47년 9월 1일 호남동 1-10(현재 목포 YWCA 인근 삼각형 모양의 주차장 자리, 영산로 137)번지 건물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건물은 일제의 적산 정미공장을 부분 수리한 것으로 건물이 낡아서 학생들의 사상 사고도 있었다. 국어교사 박기동의 습작시 '부용산'이 음악교사 안성현에 의해 작곡되어 처음 노래로 불리게 된 것도 이 교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러니 목포여자고등학교의 전신 목포공립항도여자중학교를 목포항도여중으로 단축 표기한다면 적잖은 혼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후 51년 정부의 중등교육 정책 변화에 따라 목포공립상업중학교(현 목상고등학교)와 함께 고등학교로 변경되어 오늘날 목포여자고등학교로 정착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전환과 함께 현재 용당동 목포고등학교 터로 이전하였다가 63년 현 위치인 대성동으로 재이전하였다. 호남동에 이어 용당동과 대성동까지 모두 4차례 이사와 4번의 교명 변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교의 조건
근현대 전환 시대 교육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조건과 환경이라야 학교가 제 기능을 할 수 있었을까. 민족교육 또는 근대교육을 내세운 뜻있는 인사나 지역 유지들이 힘을 모아 전국 곳곳에서 학교를 시작하였지만 난관을 겪거나 난파되기도 하였다. 특히 사립학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학교를 세우자면 교육 의지와 철학이 분명해야 할 것 같다. 교과 설치, 교육과정 설계에 방향성이 잘 드러나야 할 것 같다. 교육이 사회적 수요를 잘 반영해야 하고, 학습자의 성장과 변화가 가능하도록 가치 지향적으로 설계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활동에는 이런 진보성이 고유하게 내재되어 있다.
학습자들의 학습 의지, 학습을 통해 자기 변혁을 꾀하려는 욕구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학습 의욕을 성장 동력으로 전환하는 교사의 역량과 기술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기본 소양인 품성을 가꾸는 것은 물론 독립된 삶을 꾸리고 이를 지탱하며 살아가는 힘, 사회적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도록 공적 인간으로서 자질을 갖추게 하는 것, 이러한 요소들이 교육의 조건이었으면 다행이겠다. 학교 구성원 대부분이 이에 공감하고 가치를 공유할 때, 교육 성과가 커질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날에는 공간과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교육 환경이나 관련 법규 또는 운영 시스템도 직접 교육에 뒤지지 않는, 교육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는 지적이다. 공감하는 바이며, 문명의 전환만큼이나 교육의 가치 전환,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조희관의 브나로드
목포항도공립여자중학교(이하 항도여중)가 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조희관 교장(少靑 曺喜灌, 1905~1958)의 역할은 적중했다. 목포여자고등학교가 해방 이후 전남 서남권 아니 호남 전역에 걸쳐 여성 교육의 중심이 되도록 개교 초창기 입지를 다진 인물, 그는 진정한 인문주의자였으며 융합교육의 실천가였다.
그는 영광읍 남천리 172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이른 나이였던 11세에 배재고보(현 배재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5세였던 1920년에 졸업하였다. 당시에는 4년제였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방학이면 고향에 내려와 보통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글과 노래를 가르치곤 했다고 한다. '브나로드(Vnarod)', 고향에서 그의 교육활동은 일종의 민족운동이었다.

졸업 이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였으나 학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2년제 학교를 수료한 후 다시 영광으로 돌아왔다. 졸업하지 않은 것은 학업과 진로 사이에서 갈등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자료에 따라서는 조희관의 전공이 문과로 기재되어 있으나 상과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느 글에서 그는 "상학(商學)을 공부했으나 문학(文學)을 업으로 삼은 교육자"라고 자신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의 문학적 소양에 비추어 문과였을 거라는 추정이 강하게 작용한 듯하다. 연희전문 이후 1927년까지 목포에서 금융조합 직원으로 근무했기 때문이다. 1919년 1월 처음 영업을 시작한 목포금융조합은 일반 생활자금은 물론 상인들의 소액 사업자금을 취급하면서 목포 서민들이 즐겨 이용하는 주요 금융기관이었다. 이때의 근무 경험 때문에 그는 해방 이후 목포를 생활 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당시 영광에서는 조희방(曺喜芳, 1889~1956) 등 옛 광흥학교(영광보통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에스페란토(Esperanto)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에스페란토 운동은 제국의 언어 대신 국제 공용어(에스페란토어)를 활용함으로써 사회적 평등을 도모하자는 취지였지만, 한편에서는 모국어 사랑 즉, 한글 사랑 운동으로 전환되기도 하였다. 에스페란토어는 저항의 언어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2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다가 30년대 들어 점차 소멸하고 말았다. 조희관 교장의 한글 사랑은 아마도 여기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영광지역 신문화 운동
1935년을 전후하여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특이한 점은 중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어린이 운동 단체인 '카나리아(Canaria)회'에 합류하여 우리말과 동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카나리아는 '새로운 소식, 위기를 알리는 새'로 알려져 있는데 어린이들에게 신사상, 신문명을 깨우치는 교육 운동이었다고 판단된다. 영광유치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동요, 한글 교육, 공연 등이 주된 교육이었다. 지방의 소도시에서 일찍부터 유치원 교육, 어린이 문화 운동을 실천했다는 점은 그 어디에서 쉽게 찾기 힘든 사례이다.
동시에 동아일보 지국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 당시 지국장은 지역 소식을 전하는 통신원 역할을 하는 것이어서, 그가 작성한 기사와 문학 작품은 종종 신문에 실리기도 하였을 것이다. 1940년에는 영광유치원 원감을 맡았다. 원장은 김동설이었다. 영광유치원은 1921년 9월 1일 개설한 전남 최초의 유치원으로, 1936년 붕괴 사고로 인해 6명의 어린이들이 압사하는 참사를 겪은 뒤 1940년에 재건되어 운영되었다. 재건 뒤 첫 원감을 맡은 것이다.
1920년대 이후 영광에서 전개된 에스페란토 운동, 한글 사랑, 유치원 교육 운동, 원불교 운동, 아나키즘 운동, 카나리아회 활동 등은 하나의 줄기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독특한 지역 운동, 문화 현상에 대해 별도 연구와 추적이 필요해 보인다.
#사람을 온전히 키우는 문예교육
비록 경제학을 전공하였지만 그의 타고난 재능은 교육과 문필 활동이었던 모양이다. 해방을 맞아 광주사범학교에서 국어와 경제학을 가르치면서 시를 쓰거나 수필가로서 활동했다. 그에게 경제학은 학습된 것이었으며, 문학적 감성은 타고난 것이었다. 유학파 지식인이라는 상징성과 젊은 날 금융조합 경험을 바탕으로 46년에는 목포항을 거점으로 상업 및 금융 인재를 양성하려는 취지로 설립된 목포상업중학교(현 목상고등학교) 교감으로 초빙되었다. 당시에는 지역의 덕망 있는 지식인들을 교육계로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기대 속에서 행정과 교육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교감직 수행을 잘하였던지 47년에는 마침내 1년 만에 항도여중 3대 교장(1947.7~1950.11.)으로 다시 초빙되었다.
조희관 교장은 자신의 부임과 때를 맞춰 광주사범학교에서 인연이 있었던 안성현을 음악교사로 초빙하였다. 학교 경영자로서 구상에 맞게 교사진 보강을 한 것이다. 교과교육은 물론이려니와 자신이 갖고 있는 소중한 가치였던 문예와 체육활동을 통한 품성 교육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표출되었다. 거처가 마땅치 않았던 안성현이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도록 배려하기도 하였다.
2009년 10월 20일 목포문학관에서 일대에서 '소청 조희관 선생 추모비 제막식'이 진행되었다. 항도여중 1회 졸업생이자 우등상 대표였던 김용심은 학창 시절의 조희관 교장에 대해 이렇게 술회하였다.
"우리말과 한글을 사랑하고 순수문학 정신으로 목포 문학 발전에 기여하신 분이었다. 단호함과 학자다운 고고한 풍모를 지닌 분이었다."
이런 일화가 있다.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조희관은 교내의 온갖 한자 표지를 한글로 바꾸는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그 한 가지로, 자신의 재임 시절 내내 교문에 걸어두었던 문구가 파격적이었다. "한 송이 들꽃을 보라. 남을 시새워 하지 아니하고 힘껏 제빛을 나타내나니!" 온통 한글로만 이루어진 이 문구는 주체적 사고와 한글 사랑, 자부심이 없이는 어려운 창안이었다. 첫 구절은 사후 그의 유고집 『한 송이 풀꽃을 보라』(1959)의 제목이 되기도 하였다.
교과교육이야 이를 데 없지만 그의 특별활동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정말 특별한 것이었다.
문예부를 중심으로 『새싹』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여 학생들의 시, 소설, 수필 등 창작품을 실었다. 조희관 자신의 관심도 관심이었지만 48년에, 노래 '부용산'의 원작가 국어교사 박기동을 초빙하여 문예활동을 맡아 진행하도록 하였다. <상> 편에 언급하였지만, 이러한 토양에서 김정희, 김효자와 같이 실력을 갖춘 문학소녀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국가 대표를 낳다
예체능 교육에 대한 조희관 교장의 애초 관심은 정서 안정과 체력 증진이었다. 판이 커졌다. 여학교에서 정구, 탁구는 그렇다 하더라도 농구와 투포환까지는 낯선 종목이었다. 다른 종목에서도 성과가 나왔지만 탁구부의 활동이 단연 돋보였다.
교장의 관심과 지원에 힘입어 학생의 싹을 알아보고 꽃피우도록 도와주는 것은 교사의 몫이었다. 황계선(2회) 학생을 탁구 선수로 길렀던 김정준 코치의 사례가 인상적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황계선은 '전국 학교 대항 선수권대회'에서 여자 중등부 단식 우승에 이어 1949년 제3회 '전국 남여 종합 탁구 선수권대회'에서도 김순애와 조를 이뤄 복식에서도 우승하였다. 이 과정에서 "탁구 하면 목포, 목포 하면 항도여중"이란 말까지 나왔다.
황계선은 서울대 교육학과 입학하였지만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정명여중에서 영어와 체육을 담당하며 2, 3년간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탁구 선수로 복귀하여 57년 1월 제4회 마닐라 아시아선수권대회 단체전 준우승, 이어 1957년 3월 스톡홀름 세계선수권대회 참가하는 등 30대 후반까지 국가 대표 선수 생활을 하였다. 항도여중이 낳은 최초의 구가 대표, 목포 출신 위쌍숙, 한영자, 박정자 등과 함께 1950년대 한국 여자 탁구계를 대표하는 선수로 활약하였다.
교내 문예활동을 매듭짓는 행사가 4월에 개최되는 '항도예술제'였다. 당시에는 6년제 과정으로서 새 학년 진급이 5월이었기에 예술제는 학년말 축제 성격이었다. 학교에서 700m 거리 목포 평화극장에서 진행된 행사는 지역의 축제가 되어 학부모는 물론 목포와 주변 지역 주민들까지 몰려 극장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공연은 기악 연주, 합창, 연극이 주를 이루었다.
한편, 조희관 교장의 한글 사랑은 그가 작사한 유달중, 목포여고, 목포해양대 교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전쟁 이후에는 시와 수필 등 창작을 꾸준히 이어갔으며 항도출판사도 운영하였다. 그곳은 목포 문인들과 예술인들의 거점이 되었고 목포예총 전신인 목포문화협회를 설립하는 탯자리가 되었다. 소청(少靑), 하지만 그가 남긴 53세의 생애는 너무 짧았다.
다른 작품은 제쳐두더라도 그의 수필집 『철없는 사람』은 "우리 토박이말과 미묘한 전라도 사투리의 매력"을 깨닫게 해준다고 한다. 언어 감각으로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시인 김지하의 말이다. 나머지 이야기는 하편에 이어가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