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이야기〉홍매화 피는 유배지…임자도 조희룡을 만나다
영화가 깨운 유배지의 역사
비극의 섬에 스민 삶의 온기
임자도서 꽃핀 조희룡 예술
홍매화 따라 되살아난 남도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화제다. 비운의 현장인 유배지를 인간미 넘치는 곳으로 묘사하면서, 역사에 대한 우리 국민의 관심을 드높였다. 덕분에 박제되기 쉬운 역사가 살아숨쉰다. 지역자원을 다시 돌아보도록 하고, 지역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유배는 당사자한테 불운이고 비극이지만, 지역주민한테는 행운이고 축복이라는 말을 증명하고 있다.
부러움을 가득 안고 역사 속 유배자를 찾아간다. 남도의 오랜 유배지 가운데 한 곳이고, 지금 홍매화가 활짝 피어있는 섬 신안 임자도다.

임자도 유배인을 대표하는 인물이 우봉 조희룡(1789~1866)이다. 조희룡은 매화 그림을 잘 그린 화가, 한국문인화의 최고봉으로 통한다. 조희룡은 환갑 넘은 나이인 1851년 8월 임자도로 유배돼 1853년 3월까지 햇수로 3년, 실제 20개월 남짓 살았다. 조희룡의 대표 그림 19점 가운데 8점이 임자도에서 나왔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제자를 양성하고, 저서도 남겼다.
조희룡의 유배는 1851년 예송(禮訟)논쟁으로 시작됐다. 효종의 의붓어머니 상례 격식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논쟁이었다. 겉으론 예절 문제였지만, 속내는 왕권의 정통성 여부를 둘러싼 다툼이었다.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유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억울한 이유다.

조희룡은 이흑암리에 대나무로 울타리를 한 움막집을 마련했다. 섬생활 적응은 쉽지 않았다. 생선기름으로 호롱불을 켰는데, 기름 타는 냄새가 역겨웠다. 섬사람들과의 말도 잘 통하지 않았다. 바다의 파도도 지역말(사투리)로 철썩거리는 것 같았다. 창문 틈으로 집앞 바다를 내다보는 나날을 보냈다. 너무 외로워 시를 지었더니, 갈매기마저도 비웃는 것 같았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가 외로움을 달래줬다. 서로 몸을 부대끼며 사각거리는 대나무도 말을 걸어왔다. 계절이 바뀌고, 조희룡이 그림 붓을 들었다. 가슴 속 응어리가 손끝으로 전해져 화폭으로 옮겨졌다. 그제서야 섬과 섬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섬생활도 조금씩 적응됐다. 모든 것은 내마음에 달렸다는 말이 딱 맞았다.
조희룡은 섬사람들한테 자신의 매화 그림을 선물했다. 섬사람들도 그림을 반기며 시나브로 조희룡의 그림이 집집마다 걸렸다. 조희룡의 눈에 섬사람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부의 고기잡이와 사대부의 글공부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조희룡의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바다와 파도가 그림으로 표현되고, 어느새 자신이 그 그림 속에 살고 있었다. 유배생활과 그림이 하나되면서 조희룡의 기량이 원숙미를 더해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조희룡의 대표작으로 '황산냉운도(荒山冷雲圖)'가 꼽힌다. 거친 산과 찬 구름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자신이 사는 작은 집을 그린 작품이다. 매화에다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버무린 '용매도', 임자도의 자연을 소재로 한 '묵죽도'와 '괴석도'도 빼놓을 수 없다.





조희룡이 즐겨 본 달의 배경 무대인 은동도 지척이다. 그 너머는 보물선이 가라앉은 도덕도 앞바다이다.
조희룡 유배지 이흑암리는 임자도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을 둘러싼 대둔산과 삼각산 산그늘이 커 해가 일찍 넘어가고 어둠이 빨리 시작된다. 그때가 되면 검은 바위 두 개가 우뚝 솟은 것처럼 보인다. '이흑암'으로 이름붙은 이유다. 대둔산 아래 여섯 군데에 마을이 터를 잡고 있다고 '육암', '육바구'로도 불린다. 대둔산 산정에 옛 대둔산성의 흔적도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