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정의 국제 통상 읽기 <2> 미국의 세계무역기구(WTO)에 대한 생각] 트럼프 관세 공세 속 기로에 선 WTO…3월 각료회의, 미래 가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일방적인 관세정책은 2025년에 이어 2026년에도 지속되고 있다. 1월 20일(이하 현지시각) 국가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따른 상호 관세는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6 대 3으로 위법 판결을 받았음에도, 트럼프 정부는 1974년 무역법 제122조에 근거한 관세 부과를 곧바로 발표했다. 다만 해당 관세 부과는 150일의 기한 제한이 있어, 트럼프 정부는 1974년 무역법 제301조 및 1962년 무역확장법 제232조에 따른 관세를 보다 확대할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글로벌 교역 환경이 더욱 큰 혼란과 불확실성으로 접어든 상황에서, 국제 통상 체제의 중심에 있었던 세계무역기구(WTO)는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1995년 출범 이후 지난 30년간 세계무역을 관장해 온 WTO는 협상과 분쟁 해결이라는 두 축 모두에서 기능이 약화되고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협상 측면에서는 협정 제·개정에 166개 회원국 간 컨센서스가 요구되는 구조적 제약으로 인해, 현재까지 다자 차원의 신규 협정은 무역원활화협정과 수산보조금협정에 그치고 있다. 분쟁 해결과 관련해서도 미국의 반발로 2019년부터 상소 기구 기능이 정지되면서, 1심에 해당하는 패널 보고서가 채택되더라도 상소 절차가 진행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WTO에 대한 미국의 입장
WTO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은 그간 다자 협정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2025년 1월 트럼프 정부 출범 직후 기후변화 대응의 핵심 다자 협약인 파리협정을 탈퇴했고, 1월 7일에는 66개 국제협정 및 국제기구에서 탈퇴하는 내용을 담은 대통령 각서에 서명했다. 여기에는 파리협정의 모협약인 유엔 기후변화협약(UNFCCC)과 국제법 성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국제법위원회(ILC)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전례를 고려하면 WTO 탈퇴 가능성도 제기될 수 있었으나, 현재까지 미국은 WTO에 대해서는 탈퇴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지난해 12월 15일, WTO의 향후 방향에 대한 미국 입장을 담은 공식 의견서를 회람하며 많은 관심을 받았다.
현재 WTO에서는 세 가지 개혁 의제가 논의 중이다. 첫째는 WTO 차원의 복수국 합의의 제도화다. 166개 회원국의 컨센서스 도출이 어려운 현실을 감안해, 뜻을 같이하는 국가 간이라도 실효성 있는 협정을 체결하자는 취지다. 실제로 2024년 전자상거래협정과 투자원활화협정이 체결되었으며, 이들 협정의 WTO 체제 편입 여부가 논의되고 있다. 미국은 복수국 간 협정 체결의 필요성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둘째는 개도국에 대한 특별하고 차등적인 대우(SDT)의 개편이다. WTO에는 개도국에 대한 다양한 특혜 조항이 있으나, 각국이 스스로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며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점에 대해 미국은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다. 우리나라와 싱가포르는 2019년 현재 및 향후 협상에서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밝혔으며, 중국 역시 2025년 현재 및 향후 협상에서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했다.
셋째는 통보 의무 준수의 강화다. 이와 같은 의제에 대해 미국은 자국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 이는 WTO의 폐기보다는 개혁에 보다 방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은 추가로 세 가지 의제를 제기했다. 우선 모든 회원국에 동등한 대우를 부여해야 한다는 최혜국대우가 더 이상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교역 상대국별 차등 대우를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미 트럼프 정부가 국가별로 차등적인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미국으로서는 최혜국대우가 무효하다는 것을 선언한 셈이다. 지난해 8월, 미국의 통상정책을 총괄하는 제이미슨 그리어(Jamieson Greer)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166개 회원국의 무역정책을 규율하도록 설계된 WTO 주도의 글로벌 무역 질서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양자협정 중심의 턴베리 체제(Turnberry system) 구축을 선언했다.
이외에도 미국은 WTO 사무국 기능의 축소, 분쟁 해결에서 안보 사안은 각국의 주권적 판단이라는 입장을 재확인하고, 분쟁 해결 기구가 회원국의 필수 안보 이익 판단을 재평가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다수 조치가 경제안보를 명분으로 하고 있는 만큼, 이러한 기조는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WTO 미래 가늠하는 ‘WTO 각료회의’
향후 WTO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회의가 3월에 예정되어 있다. 3월 26일부터 29일까지 카메룬에서 개최되는 제14차 WTO 각료회의(MC14)가 그것이다. WTO는 2년마다 각국 통상 장관이 모여 주요 사안을 결정한다.
특히 이번 제14차 WTO 각료회의에서는 미국의 입장을 중심으로 한 WTO 개혁 논의와 더불어, 미국의 또 다른 관심사인 전자 전송물에 대한 무관세 관행의 연장 여부가 논의될 예정이다. 물리적인 책이나 영화필름에는 관세가 부과되지만, 전자책이나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한 디지털 콘텐츠 같은 전자 전송물에는 현재까지 관세가 부과되지 않고 있다. WTO는 1998년 이후 각료회의 때마다 전자 전송물에 대한 관세 부과를 유예하는 관행을 반복적으로 연장해 왔으며, 지난 26년간 이러한 체제가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디지털 콘텐츠 교역이 확대됨에 따라 인도, 인도네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은 개도국의 세수 손실이 크다는 이유로 관세 유예의 자동 연장에 반대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24년 제13차 WTO 각료회의에서는 전자상거래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제14차 WTO 각료회의 또는 2026년 3월 31일 중 먼저 도래하는 날까지로 한시 연장하기로 했다. 따라서 이번 각료회의에서 추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전자 전송물에 대한 무관세 관행은 종료된다.

관심 쏠리는 ‘전자 전송물에 대한 무관세’
아마존을 비롯한 미국 전자상거래 기업은 이 사안에 큰 이해관계가 있으며, 미국 정부 역시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전자 전송물 이슈는 미국이 WTO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된다.
인도네시아는 전자 전송물 무관세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해 온 국가로, 2018년 자국 관세법을 개정해 무형물 분류를 신설하고 전자 전송물에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해 6월 미국과 관세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인도네시아에 19%의 상호 관세를 부과하면서 인도네시아는 무형물 분류를 삭제하고 WTO 전자 전송물의 영구적 무관세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인도 역시 2월 7일 미국과 무역협정 프레임워크에 합의하면서, 미국의 인도산 수입품 관세율을 기존 50%에서 18%로 인하하기로 했고, 디지털 규범에 관한 협정 체결에도 합의했다. 이에 따라 인도의 입장에도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글로벌 콘텐츠 강국으로서 한국의 지위를 고려할 때 전자 전송물에 대한 무관세 유지가 우리에게 유리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이 문제가 미국이 WTO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게 하는 핵심 이슈라는 사실이다.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해 WTO가 다시 제도적 모멘텀을 확보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은 196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가입 이후 안정적인 다자 교역 체제의 혜택을 누려온 대표적인 수혜국이다. WTO가 본연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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