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다, 영화 ‘드림스’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92번째 레터는 18일 개봉하는 영화 ‘드림스’입니다. 18일에 개봉작이 많네요. ‘드림스’는 작년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인데, 영화 스펙보단 제시카 차스테인 출연작이라 관심이 갔습니다. 그녀가 ‘드림스’ 출연 이유를 밝힌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가 좋았던 것과 같은 이유”라고 했거든요. 제시카가 말한 ‘그 이유’에 저도 매우 동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드림스’와는 어떻게 통하는지 아래에서 말씀드릴게요. 실제로 아메리칸발레씨어터(ABT)의 수석 무용수인 아이작 에르난데스가 제시카의 상대역으로 나와 춤이면 춤, 몸이면 몸, 다 보여주는(청불입니다) ‘드림스’의 세계로 들어가보실까요.

이 영화 제목은 ‘드림스’, 즉 꿈인데, 제 생각엔 꿈보단 욕망이 맞지 않나 싶어요. 꿈은 꾸는 거잖아요. 막연하고.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거리에 있고. ‘드림스’의 인물은 꾸고 있지 않습니다. 달려들어요. 원하고 싸우고 쟁취합니다. ‘드림스’의 꿈은 진한 욕망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가지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가지지 못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가진 줄 알았으나 착각임을 깨달았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보여줍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황량한 배경에 트럭 등장. 이게 뭔가, 여기가 철길인가 싶은데 바로 밤으로 전환돼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꺼내주세요!” 아우성이 들리고, 곧바로 사람이 짐더미처럼 쌓여있는 광경이 노출됩니다. 트럭에 짐이 아니라 사람이 있었던 거고, 멕시코인들이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불법 입국하려다 발각된 거였어요. 단속반원들이 깔리고 혼란을 틈타 한 젊은 남성이 길을 찾아갑니다. 차를 얻어타고 산 넘고 물 건너 멀리 샌프란시스코까지. 어느 부유층 주택가에 가더니 벨을 눌러보고, 응답이 없자 구석에 숨겨진 열쇠를 바로 찾아내 집으로 들어갑니다. 귀가한 집주인 여성, 침대에서 자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는데, 으악 비명을 지르려나 싶은 찰나, 웬걸, 다정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어떻게 왔어?” 그리고 곧바로 못 참겠다는 듯이 청불 장면으로.

산 넘고 물 건너 여자를 만나러 온 남자가 주인공 페르난도(아이작 에르난데스), 멕시코인이고 발레 댄서, 집주인 여성이 주인공 제니퍼(제시카 차스테인), 어마어마한 부잣집 상속녀입니다. 제니퍼는 재벌 아버지가 설립한 문화재단의 대표이고, 재단이 멕시코시티에 세운 댄스학교에서 페르난도를 만나 깊은 관계가 됩니다.
둘은 차이가 많아요. 경제적 차이,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명확한 계급의 차이가 있고, 나이 차이, 여자가 10살쯤 많아 보이고(한 번 결혼했다가 이혼했다고 나와요), 백인 여성과 히스패닉 불법체류자라는 차이 등등 위태로운 차이만 갖고 있습니다.
여자는 모든 걸 다 가졌지만 남자의 마음을 갖지 못해 애태우고, 남자는 재능만 가졌을 뿐, 나머지 모든 것이 난제입니다. 공통점이라고 하면, 예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 정도? 근데 공통점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모든 걸 뛰어넘는 갈망과 욕구가 있는데. 일단 여자가 남자를 너무 좋아해요. 영화가 그걸 아주아주 잘 보여줍니다. 그녀는 바쁜 와중에 잠시라도 짬이 나면 그냥 보기 아까워 죽겠다는 듯이 휴대폰으로 남자의 동영상을 감상합니다. 춤추는 모습, 같이 찍은 릴스 같은 거. 자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길은 어둠 속에서도 간절함 그대로 느껴져요. 제시카 차스테인이 연기를 잘해서 그렇기도 하고요.

문제는(문제가 있어야 영화가 전개되겠지요), 욕망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기엔 남자의 욕망 역시 너무 분명했다는 거죠. 도입부에 나왔듯 위험한 월경을 감행해서 여자를 만나러 올만큼 배짱과 자신감이 있고(물론 여자가 있는 곳이 미국이라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여자가 둘의 관계를 숨기려고만 하자 “내 길은 내가 찾겠다”며 집을 나가 연락을 끊어버립니다. 속된 말도 땡전 한 푼 없는데도요. 경찰 단속을 피해 모텔과 술집 알바를 하고, 발레 표를 구하려고 공연장 앞에서 ‘한 표 줍쇼’ 공연을 하면서도 전혀 꿇려보이지 않아요. 여자가 애가 타서 계속 연락하지만 무시해버립니다. 남들 택시 잡는 것보다 쉽게 전용기를 타고 날아다니고, 양쪽 팔에 신상 루이비통 가방을 하나씩 들고 다니는 부유함으로도 남자의 행방을 알아내는데 실패한 여자, 흥신소를 찾아갑니다.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상관없어요”라며 부탁해보지만, 어쩌겠습니까.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것도 가끔 있는 것을.
이를테면 이런 장면. 둘이 식당에 갔는데, 식당 서버도 히스패닉이었어요. 남자는 서버가 권하는 추천요리 대신 완전히 다른 걸 선택하고(메뉴 선택만 봐도 드러나는 그의 성격) 스페인어로 서버와 한참 뭐라뭐라 대화를 합니다. 없는 사람 취급당한 여자가 화가 나서 “나 잊어버렸어?”라고 불만을 드러내요. 이에 대한 남자의 파워당당 답변. “스페인어 배워. 남친이 멕시코인이잖아.” 여자가 주는 용돈을 받아쓰는, 당장 오늘밤 잘 곳이 없는, 경찰 단속 뜨면 즉시 쫓겨날 불법체류자의 답변이 이렇습니다. 스스로를 ‘남친’이라고 당당하게 지칭하는 것에서도 드러나지만, 페르난도는 돈 많고, 돈이 주는 권력도 막강한 제시카에게 밀리거나 끌려다닐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리고, 마침내 여자와 남자가 선택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그의 이런 태도는 결국 파국을 부릅니다. 잔인한 파국을.

저는 여자가 남자를 정말로 좋아했다고 봤어요. 결말에서 여자가 어떤 고백을 하는데, 아니 저 고백을 왜 해, 하실 분도 계실 거 같아서요. 제 생각엔, 정말로 좋아해서 그래요. 하지만, 사랑이 흔히 그렇듯, 사랑해서 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상처만 남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요. 결말 부분에 여자의 특정 대사를 일부러 들려주지 않는데 그래서 저는 그녀의 결심을 더 오래 기억할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로든.
이번 레터 도입부에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를 제시카 차스테인이 좋아했다고 말한 인터뷰를 말씀드렸죠. 왜 ‘드림스’ 출연을 결정했냐는 질문에 그녀가 말했습니다. “사람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는게 아니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 처해지느냐에 따라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디렉터 박의 ‘노 어더 초이스’가 좋았어요. 그런 인물들이 나오니까요. ‘드림스’ 인물도 그래요. 그런 면에서 제니퍼는 평범한 사람인거죠.” 그녀의 생각에 저도 적극 찬성합니다. ‘드림스’에 이민자가 나와서 정치사회적 맥락으로 해석하는 분들도 있던데, 저는 그쪽보다는 욕망의 밑바닥, 관계의 비가역적 역학을 미세한 균열과 찌꺼기까지 드러내면서 밀고 간 게 ‘드림스’의 추동력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민자가 나오긴 하지만 트럼프 2기 시작 전에 촬영 완료된 영화라 단순히 트럼프 비판을 위한 목적은 아니기도 하겠고요.
남자 배우 얘길 안 할 수가 없겠습니다. 아이작 에르난데스, 첫 문단에 말씀드린 대로 실제로, 진짜, 아메리칸발레씨어터(ABT)의 현직 수석무용수입니다. 발레를 전혀 모르신다면 ABT가 생소하실 수 있는데, (저는 야구단 배구단 농구단 이름 들으면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 합니다) 쉽게 말해 세계 최강. 수석무용수는 그중에서도 최고. 아이작 에르난데스는 멕시코 출신으로 처음으로 ABT 수석무용수가 됐습니다. 부모가 모두 무용수였고, 동생도 발레리노라고 하네요. 춤은 어떤 예술 분야보다 유전자와 타고난 재능에 크게 좌우되긴 해요. 한국인 최초의 ABT 수석무용수는 발레리나 서희. 2012년 7월에 됐는데, 발레의 신이 내렸는지, 그녀가 수석무용수 통보를 받던 날이 제가 인터뷰하려고 뉴욕에 찾아간 날이었답니다. 심지어 저랑 만나기 5분 전에 통보를 받았어요. 그때 제가 쓴 기사를 다시 찾아보니 새삼 감격이 밀려오네요. 그래서 제 폰에는 아름다운 서희씨의 사진이 여전히 여러 장 저장돼 있습니다. 단순한 우연이라기엔 너무 특별한 느낌이었거든요.
이야기가 잠시 말이 딴 길로 샜는데, 여튼 ABT 수석무용수는 세계에서 제일 춤 잘 추는 사람이라고 보시면 되는데, 아이작 에르난데스 역시 마찬가지죠. 페르난도가 가진 자신감과 당당함을 드러내기 위해선 실제로 매우 잘 추는 그의 춤을 보여주는 게 영화에서도 중요했겠고요. ‘드림스’에서 그가 춤추는 모습이 몇 번 나오는데 마음껏 감상하세요.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의 청불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안무 짜듯이 동작을 짠 거 같더군요. 그래서 자극적이라기보다 격렬한 춤사위 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저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으로 보고 있자니 저는 어쩐지 서글퍼지던데, 이건 저만 그럴 걸 수도요. 실제 결말이 서글픈지 어떤지는 보시고 여러분 각자가 판정을. 끝으로 아이작 에르난데스의 발레 동작을 보실 수 있는 짧은 클립 붙이고,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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