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리 넘게 흐른 피가 멈춰 피끝마을 이니더”···‘왕사남’ 돌풍에 영주도 ‘조명’

“핏물이 저짝 개천까지 내려왔니더. 그래서 여가 ‘피끝마을’ 이니더.”
경북 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 노인회관에서 지난 10일 만난 김광자씨(85)가 창문 밖 논두렁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133명이 사는 이 작은 마을에서 금성대군과 단종은 세종대왕만큼이나 익숙한 이름이다. 관람객 1200만명을 돌파하며 인기몰이 중인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하기 훨씬 전부터다.
노인회관을 찾은 다른 주민들은 “우리 마을 사람들은 영화(왕사남)는 아직 못 봤어도 드라마(왕과비)는 다 봤지”라며 “어린 왕을 마지막까지 지킨 사람이 금성대군 아니냐”고 입을 모았다. ‘왕과비’는 1998년 방영된 드라마로 단종 즉위와 세조의 왕위 찬탈 등 조선 전기 왕실 권력 다툼을 다뤘다.
20살에 이곳으로 시집와 한평생을 살고 있다는 김씨는 이곳 ‘피끝마을’에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된 비극적인 역사가 서려 있다고 했다. 그는 “마을사람들이 반역죄로 몰려서 참 많이 죽었다고 들었다”며 “마을 곳곳에 그 사건과 연관된 곳이 많다”고 말했다.
1457년(세조 3년) 단종 복위를 꾀하던 금성대군은 순흥도호부로 유배된 뒤에도 복위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순흥부사 이보흠과 거사를 도모했지만 시녀 김련과 관노의 밀고로 계획이 들통났다고 전해진다. 금성대군은 결국 사사됐고, 단종의 장인 송현수도 처형됐다. 복위의 불씨가 꺼지면서 단종 역시 끝내 죽음을 맞았다.

정축지변으로 불리는 사건의 후폭풍은 더욱 참혹했다. 안동부사가 군세를 이끌고 와 순흥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죽였으며, 한양에서 중기병과 철기병이 출동해 2차 학살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근방 30리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표현도 따라붙는다. 당시 순흥과 주변 호구는 284호 1679명으로 기록돼 있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희생자가 약 300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모의 땅으로 낙인찍힌 순흥도호부는 결국 폐부됐다. 이 과정에서 많은 백성들이 죽계천의 청다리로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살아남은 아이들을 관군이 데려다 길렀다는 이야기에서 ‘다리 밑에서 데려왔다’는 말이 생겨났다는 설도 전해진다.
피끝마을의 사연은 영주 고치령으로 이어진다. 소백산맥을 넘는 세 고갯길 가운데 하나인 고치령은 충북 단양군 의풍리와 강원도 영월군 하동리,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를 잇는 가장 가까운 통로다. 금성대군과 단종의 밀사들이 오갔던 비운의 길이기도 하다.
고개 정상에는 소백산신과 태백산신을 모시는 산령각이 있다. 태백산신은 단종을, 소백산신은 금성대군을 뜻한다.

김기진 영주문화원장은 “순흥 지역 주민들은 단종과 금성대군을 원망하기보다 오히려 충절을 기리며 위령제를 이어왔다”며 “지금은 영월군과 함께 이를 문화제로 발전시켜 지역 축제로 열고 있다”고 말했다.
금성대군을 기리는 신단은 소수서원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숙종 47년 순흥부사 이명희가 왕의 허락을 받아 금성대군의 유허지에 신단을 설치했다. 신단 서쪽에는 입 모양이 오리발처럼 생겼다고 해 ‘압각수’로 불리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영주시 관계자는 “정축지변 이후 나무가 말라 죽었다가 약 200년 뒤 숙종 때 금성대군이 사후 복관·복직되고 순흥부도 복설되면서 다시 새싹이 돋아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며 “금성대군과 관련한 문화 콘텐츠를 정비하고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현수 기자 kh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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