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2.0] 박정희의 ‘분할 통치’와 JP의 ‘2인자論’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2026. 3. 1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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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2인자’들은 기본을 갖추려는 의지도 없는가
1971년 12월 23일 나란히 앉아 있는 박정희(오른쪽) 대통령과 김종필 국무총리./조선일보 DB

제3공화국 시절의 박정희는 ‘용인술(用人術)의 대가’였다는 평을 받는다. 그 요체는 정교한 ‘분할 통치술’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후락의 청와대 비서실과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를 서로 견제토록 하는 방법이었다. 사실 군부와 여당인 공화당도 박정희를 100% 지지한 것은 아닌 상황에서, 2인자 또는 잠재적 2인자들이 서로 경쟁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통치력을 강화하려는 기술을 발휘한 것이었다. 이것은 항명(抗命) 사태를 해결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1965년 12월 국회의장단 선출을 둘러싼 공화당 내 ‘구주류’ 김종필계의 항명 사태는 박정희의 분할 통치술이 본격화된 계기로 볼 수 있다. 박정희는 김종필이 군부의 압력으로 두 번째 외유에 나간 뒤 이후락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 힘을 실어 주면서 측근 세력을 양성했고, 김성곤 등 공화당 ‘신주류’에게 당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한편으로 김종필을 공화당 당의장으로 복귀시켰다.(오인환 ‘박정희의 시간들’)

1968년 5월 구주류의 김용태 등이 당에서 제명됐다. 김종필을 박정희의 후계자로 옹립하기 위해 국민복지회 사건을 일으키는 등 분파 행동을 했다는 이유였다. 이로 인해 JP는 공직에서 물러나는 동시에 탈당하겠다며 부산으로 내려갔다. 박정희가 이후락을 보내 설득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후 구주류는 1969년 4·8 항명 사건으로 3선 개헌 반대 의사를 밝혔고 양순직·예춘호 등 5명이 제명되는 결과를 빚었다.

이 무렵 박정희는 김종필을 청와대에 불러 직접 설득에 나섰다.

“임자! 임자가 안 도와주면 누가 날 도와주겠어? 속상한 일이 많다는 거 충분히 알고 있어. 이제 뭔가 돼 가는데 아무리 봐도 앞길이 순탄치 않아. 이 시기를 놓치면 더 어려워져. 임자가 (대통령) 하는 셈치고 날 도와줘!”

JP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대통령이 내 눈을 응시하며 ‘같이 목숨을 걸고 혁명을 했는데 혼자 살려고 그래?’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면서 같이 가자고 했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박정희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종필이 네가 신당을 한다면서? …그래 한번 잘해 봐!”라며 협박하듯 말했다는 증언도 있다. 결과적으로 이 시점에 JP를 부른 박정희는 시의적절하게 그를 다시 자기 편으로 돌아서게 한 정치적 묘수를 썼던 셈이다. 박정희가 3선에 성공한 뒤인 1971년 6월 JP는 국무총리가 됐다.

박정희는 정말 JP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과 정무수석을 지낸 유혁인은 ‘대통령이 JP를 후계자로 내정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JP를 미리 국무총리에 임명한 뒤 자신은 임기가 끝나기 1년 전에 사임하고, JP에게 대통령 권한대행을 시키는 방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증언도 있다. 큰딸 박근혜는 ‘아버지가 최규하 같은 유능한 관료 출신을 후계자로 구상하고 있었다’고 했다. JP 자신은 ‘대통령이 후계 운운하는 말을 들어본 적 없다’고 했다. 박정희는 집권 마지막까지 후계 구도를 애매하게 남겨두려 했던 것 같다는 것이 통설이다.

유신 헌법 개헌 직후 1972년 12월 27일 거행된 제8대 대통령 취임식의 자료 화면을 보면, 김종필 부부는 표정 관리를 전혀 하지 못한 채 침통한 안색을 내비치고 있다. 평소의 JP답지 않게 ‘나는 이제 대통령이 되긴 글렀구나’ ‘영원히 2인자로 남아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그대로 읽힌다. 하지만 유신 시절에도 JP는 1975년 말까지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여전히 ‘살아남았다’.

김형욱, 이후락, 김성곤과 달리 JP는 어떻게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오인환은 이렇게 분석한다. 첫째, JP는 박정희에게 계속해서 쓸모가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5·16, 중정 창설, 공화당 조직, 한일 회담, 3선 개헌 등 중요 국면마다 큰 역할을 했다. 둘째,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JP의 2인자 처세술이었다. 예술적 소양을 갖추고 낭만적 감성을 지닌 JP는 박정희가 ‘강인하고 이지적이며 냉혹한 권력자지만 소박하고 수줍어하기도 하며 인정에 약한 구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감성적으로 대화할 때 박정희가 여유로워지고 너그러워진다는 것을 오랜 경험에서 체득했던 것이다. 감성적 대화를 하면서 역린(逆鱗)을 건드리지 않고 직언하는 요령도 익히고 있었을 것이다.

1980년 JP가 신군부 세력에 의해 정치 활동이 금지된 직후, 그의 청구동 집에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노태우 보안사령관이었다. 노태우는 JP에게 뜻밖의 질문을 했다.

“저… 2인자로 오래 살아남으려면... 우째야 되겠습니까?”

JP는 훗날 중앙일보에 연재한 회고록에서, 당시 이렇게 대답했다고 회고했다.

“권력을 장악한 1인자는 2인자를 소외하거나 무력화하고 싶어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2인자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두 가지만 얘기해 주겠다. 첫째, 절대로 1인자를 넘겨다보지 말아라. 비굴한 정도는 안 되겠지만 품격을 유지하면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이때도 2인자다운 논리가 서야 한다.

둘째, 있는 성의를 다해서 일관되게 1인자를 보좌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해라. 조금도 의심을 받을 만한 일은 하지 말아라. 때가 올 때까지 1인자를 잘 보좌해야 한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넘겨야 한다. 참는다는 것은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게 진정한 인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 왔다.”

한 원로 언론인은 JP의 회고록 연재 당시 ‘그거 다 거짓말이야!’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과거의 숱한 일들에 대해 번번이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미화했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 JP가 노태우에게 위의 저 워딩대로 말했는지도 의문이고, 실제로 박정희 밑에서 저렇게 살아온 것인지에 이르면 더욱 의문이 든다.

위 사진부터 1966년 6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자리를 함께 한 김종필 공화당 의장. 1990년 1월 3당 합당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손을 맞잡은 김종필 공화당 총재. 1996년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서울 보라매 공원에서 공동 집회를 갖고 공조를 과시하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

하지만 이것은 박정희 정부에 이어 훗날 YS와 DJ 정부에서도 2인자로 처신했던, 한마디로 ‘평생 2인자로 살아남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정리한 한국사 유일의 ‘체험적 2인자론(論)’이라는 데서 가치를 지닌다. 이것은 국가의 2인자뿐 아니라 조직의 2인자, 부서의 2인자, 심지어 가정의 2인자(요즘은 대부분 남편들)들도 꼭 참고할 만한 문장이다.

대체로 저 말, 또는 저 말과 비슷한 말을 들은 노태우는 실제로 그 후 7년 동안 그것을 충실히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저 ‘2인자론’이 정작 필요한 사람은 저 말 또는 저 말과 비슷한 말을 읽어본 적조차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쯤 되면 왜 내가 이 시점에 이 글을 썼는지 눈치채는 분이 많을 것이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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