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합리적 바보’가 아니라 ‘윤리적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 [.txt.]
합리성·가치 선택하는 게 역량…자유가 뒷받침
불평등·양극화 심화한 오늘날 더욱 빛나는 통찰

흔히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이라고 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경제학이 통계학·대수학·미적분학 등 수학적 도구와 정교한 모델을 사용해 경제 현상을 분석하고, 가설을 검증하고 예측하며, 논리적 설명력으로 다양한 분야의 국가 정책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위상을 비유한다. 인간의 욕망을 숫자로 환산해 효용을 계산하고 시장과 후생의 균형을 방정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마치 자연과학자가 물리법칙을 설명하는 것처럼 냉철하고 객관적 학문이라는 인상을 준다.
바로 그런 이유로 경제학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다루면서도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학문으로 여겨진다. 그 핵심 전제가 ‘합리적 인간’, 다시 말해 인간의 판단과 행동이 합리적 선택의 결과라는 가설이다. 이때 합리성은 각자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능력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는 기본적으로 ‘이기적 인간’이다.
인도 출신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93, 미국 하버드대 교수)은 이런 익숙한 가정을 반박하고, 경제학이 인간의 존엄과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할 수 있는 길을 천착해 왔다. 그의 2002년 저작 ‘자유란 무엇인가’(원제는 ‘합리성과 자유’, Rationality and Freedom)는 언제부턴가 공학에 가까워진 경제학을 윤리적 학문으로 복원한 책이다. 1970~1980년대 논문들과 강연을 추려 재구성한 선집으로, 센의 경제철학 사상이 응집된 주저다. 센은 빈곤·기아·불평등 문제에 대한 연구를 ‘역량 접근법’으로 체계화해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경제학상(1998년)을 받았다.

센은 ‘합리적 인간’ 가설이 “개인의 행동을 가치나 윤리와 분리함으로써 경제적 행위를 급진적으로 단순화”한다고 비판한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종종 도덕적 의무, 정의감, 타인에 대한 책임감 등으로 자기 이익에 반하는 선택을 한다. 외부의 강압이 아니라 내면의 자유 의지에 따른 것이다. 주류 경제학의 관점에서 이는 합리적이지 않다. 센은 인간의 이타성을 설명하기 위해 ‘헌신’(commitment)이란 개념을 가져온다. 이때 헌신은 동정(sympathy, 공감·연민)과 구별된다. 동정은 자기감정의 만족을 포함하지만, 헌신은 효용 계산을 넘어선 선택이다.
센은 책에서 크게 세 축을 중심으로 자신의 경제철학 사상을 펼친다.
첫째,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기존 주류 경제학의 협소한 시각, 즉 “개인은 오로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 다른 목적에는 아무런 역할도 부여되지 않으며, 자기 이익 이외 모든 가치는 무시된다”는 전제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재정의한다. 센은 그런 인간을 ‘합리적 바보’라고 표현했다. 최상의 이익, 자신의 지향, 윤리적 행동이라는, 본질적으로 다른 질문과 선택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를 암묵적으로 부정당한다는 점에서 “합리적 바보는 억압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센에게 합리성은 자유로운 선택과 직결된다. 합리성은 “주어진 조건에서 자신의 목표와 가치에 부합하는 선택”을 하는 능력이다. 자유는 단지 외부의 구속이나 강제를 받지 않는 상태를 넘어 “가치 있는 일을 하거나 누릴 수 있는 적극적 능력 혹은 역량”을 의미한다. 따라서 합리적 선택은 단순히 선호나 욕구가 아니라, 지향·헌신·정체성과 같은 심층적 요소로 결정되며, 합리성은 이익 극대화를 넘어선 이성적 성찰의 과정이다.
센은 “개인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역량의 관점에서 자유와 기회를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역량 접근’은 유엔의 인간개발지수(HDI) 산정 등 국제정책 수립에 이론적 근거가 됐다. 개인의 선호가 고정된 게 아니라 형성 과정과 대화 등을 통해 바뀔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요약하자면, 자유는 합리적 선택의 조건이며 합리성은 자유의 가치를 판단하는 능력이다.

둘째, ‘사회적 선택’ 이론을 재구성했다. 사회적 선택 이론은 개인들의 다양한 선호를 모아 집단 전체의 결정을 도출하는 방법론이다. 앞서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가 특정 조건에서 모든 참여자의 후생을 만족시키는 민주적·집합적 의사 결정 함수는 없다는 ‘불가능성 정리’(1951)를 발표했다. 센은 이런 난제가 민주주의의 결함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정보의 범위가 협소하기 때문이라고 봤다. 고립된 참여자들이 각자 최선의 선택을 하지만 모두에게 최악의 결과를 낳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 대표적 사례다.
센은 사회적 선택을 효용이나 선호의 집계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권리·역량·과정의 공정성 등 다양한 정보를 포함하는 ‘가치의 체계’로 접근할 것을 주장한다. 효용이라는 단일 척도에 갇혀 있던 후생경제학을 다차원적 가치로 확장한 것이다. 불가능성 정리 이후 허무주의와 교착 상태에 빠졌던 사회적 선택 이론에도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됐다.
센은 ‘결핍’을 “최소한으로 수용 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의 결여”로 봤다. 빈곤이나 기아를 ‘역량의 결핍’으로 이해하면 해결책에도 새로운 접근법이 열린다. 예컨대 “기아는 일부 인구 집단의 실질소득이 급감하고(…) 식량 생산이나 공급이 감소하지 않더라도(…) 일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충분한 양의 식량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정보의 초점을 식량의 ‘공급’에서 ‘권리’로 옮겨야 근본적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
셋째, 정의의 기준에 대한 전환이다. 센은 존 롤스의 정의론이 제도의 구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비판하고, 완벽한 정의의 설계보다 현실의 부정의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의는 이상적 청사진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자유와 역량이 얼마나 확장되었는가로 평가돼야 한다는 것이다. 센이 생각한 정의는 역량의 평등을 통해 실질적 자유를 성취하는 것이다. 센은 자신의 정의론을 따로 모은 저작 ‘정의의 아이디어’(The Idea of Justice, 2009년)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 책은 국내에도 같은 제목으로 번역본(2019년, 지식의날개)이 나왔다.
센은 ‘어떤 사회가 더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이 점점 경제학의 바깥으로 밀려나는 흐름에 맞서 경제학 본연의 윤리적 전통을 되살리려 했다. 경제학이 단순히 시장의 작동을 설명하는 기술적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학문이기를 원했다. 경제학을 철학과 다시 연결하고, 성장 패러다임에 갇혔던 경제 정책에 자유·정의·민주주의 같은 가치의 실질적 효용을 증명하려 애썼던 이유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센이 자기 이익에만 매몰됐던 ‘합리적 바보’를 더 가치 있는 행동을 선택하는 ‘윤리적 인간’으로 복권했다는 점일 테다.
옮긴이 김대근 박사(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 기초법)는 “이 책이 나온 지 25년이 지났지만 부의 불평등과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절대빈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현실에서 센의 사유는 더 깊은 통찰력과 시사점을 준다”고 평가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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