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재탄생] 도공의 손길·숨결 따라 1500년전 역사를 걷다
칠갑산 자락 옛 가마 본뜬 건물
토기·유물·농경문화 한자리에
‘추억의 거리’ 군민 기증품 빼곡
주변 관광지 연계 방문객 북적

칠갑산 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길, 동그랗게 솟은 반구형 황토빛 건물이 햇살을 받고 서 있다. 흙을 빚고 굽던 옛 가마를 본뜬 이 건물은 백제 장인의 손길을 떠올리게 한다. 문을 여는 순간 1500년 전 가마 속으로 들어선 듯하다.
이곳은 충남 청양군 대치면에 있는 ‘백제문화체험박물관’. 한때 수정초등학교 칠갑분교가 있던 자리다. 칠갑분교는 1934년 문을 열어 76년 동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특색 있는 교육과정으로 교육과학기술부 학교 경영 우수사례에 선정될 만큼 활발하게 운영됐다. 하지만 지역인구가 줄면서 학생수가 감소했고 1995년 분교로 격하된 뒤 2010년 결국 문을 닫았다.
한동안 비어 있던 교정에 다른 쓰임새가 생긴 건 2011년이었다. 청양군이 부지를 매입해 박물관을 짓기로 한 것이다.

청양은 웅진·사비 백제 시기 도성으로 기와를 공급하던 중심지였고 곳곳에 백제 토기가마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백제의 옛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에 가려 좀처럼 주목받지 못했다. 2003년 공주∼서천 고속도로 공사 과정에서 발굴한 백제 토기가마 유물이 적당한 보관 장소를 찾지 못해 청양휴게소에 임시 보관될 정도였다.
군은 문화자원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지역의 이야기를 전할 공간을 짓기로 결심했다. 사업비 103억원을 들여 지역 최초 공립박물관을 세웠고 2016년 문을 열었다.

박물관 입구에는 거대한 가마터가 재현돼 있다. 전시장 바닥에 흩어진 토기 파편과 완형 유물은 마치 백제 도공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듯 생생하다.
전시는 백제 토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청양의 시간을 따라 걷는 역사실, 우리나라 최대 금광이었던 청양 구봉광산을 재현한 금광체험관, 그리고 농경사회 속 생활의 결을 보여주는 농경문화전시관까지 한자리에 모아놨다.

한편에는 코리아나화장품 창립자 유상옥 회장의 기증실도 있다. 평소 전통 유물 수집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개관을 앞두고 토기·자기 200여점을 기증했다. 지역 출신 기업가가 고향 문화공간에 힘을 보탠 웅숭깊은 마음이 전시실 곳곳에서 느껴진다.

여러 전시 가운데 관람객의 걸음을 가장 오래 붙잡는 곳은 단연 ‘1960년대 추억의 거리’다. ‘청양극장’ 앞의 낡은 영화 포스터, ‘미래 이용원’의 이발기 그리고 LP판과 손때 묻은 만화책까지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이 물건들은 박물관 조성 당시 대부분 청양군민이 내놓은 것이다. 집 안 깊숙이 잠들어 있던 물건들이 이곳에서 대중과의 만남을 기다린다.
백인화 청양군 문화체육과 학예연구사는 “홍보를 따로 하지 않았는데 현재까지도 군민이 자발적으로 기증을 이어간다”며 “지난해엔 오래된 지게를 맡긴 어르신도 계셨는데,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학교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공간도 있다. 1969년 칠갑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해 교편을 잡았던 고(故) 한상돈 선생의 기념관이다. 생전에 수집한 교과서와 교구재, 학습자료를 유가족이 기증해 꾸렸다. 옛 교정 위에 세워진 박물관에서, 교실 풍경은 아이들이 뛰놀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주말과 방학이면 박물관에는 가족 단위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어린이백제체험관·장곡사·칠갑산장승공원 같은 주변 관광지와 연계해 찾는 나들이객의 발길도 잦다. 청양투어패스를 이용하면 무료로 관람할 수 있어 부담 없다.
지난해 박물관을 찾은 방문객은 2만1000여명이다. 청양 인구가 2만9000여명인 것을 고려하면 이 정도 관계인구를 끌어모은 것은 고무적이다.
과거 장곡리 이장으로 마을 대소사를 맡았던 김삼덕씨(75·대치면)는 “학교가 없어지니 마을의 구심점이 사라진 것 같아 안타까웠다”며 “그래도 폐교가 방치되지 않고 인근 지역민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바뀌어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지금은 박물관 주변 공원이 주민 산책로가 됐고, 산책길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시실을 둘러보는 어르신도 많다.
백 학예사는 “올해는 청양의 문화와 역사를 알릴 유물을 문화유산표준관리시스템에 등록해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박물관 소장품 통합검색 사이트 ‘e뮤지엄’에도 올려 더 많은 이가 청양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도록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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