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첫’] 기술 아닌 ‘기세’ 싸움…윷놀이 기선 제압 한판에 ‘후끈’
가족끼리 편 나눠 즐기는 놀이
규칙 두고 실랑이하다 판 열려
승부 향방 가르는 ‘첫판’ 초긴장
윷가락 공중에 날아오르는 순간
함성은 응원가이자 간절한 기도
져도 괜찮아 역전 노리는 투지
같은 편 뭉치며 정은 더욱 단단


윷놀이는 가족끼리 놀면서 승부를 가리는 거의 유일한 전통 민속놀이다. 설을 쇠고 나면 집집마다 윷판을 만들고 서랍에 넣어둔 윷가락을 꺼내오고 편을 나눈다.
첫판을 시작하기 전 몇가지 규칙을 정한다. 지역과 풍습에 따라 규칙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 도에서 한칸 뒤로 물리는 ‘빽도’와 윷가락이 판의 밖을 벗어나면 무효로 처리하는 규칙은 상당히 보편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 집에는 특이하게도 윷판과 윷가락에 ‘전주’라고 써놓은 게 하나 있다. 이 윷가락이 나오면 윷판을 거의 한바퀴 휘돌아 표시해 놓은 ‘전주’에 발 빠르게 성큼 다다르는 행운이 부여된다. 전주에 40년 살면서 만들어진 이 엉뚱한 규칙은 고향 예천으로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다. 윷가락 글씨가 사라지지 않는 한 ‘전주’는 우리 집 윷판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윷놀이 재미는 규칙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데서 시작된다. 윷을 굴리지 말고 높이 던져야 한다든지, 윷이나 모가 나오면 술을 한잔 권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입씨름이 격화된다. 상대측 이의 제기에 따라 또 다른 어깃장이 더해지면 윷놀이보다 기를 뺏기지 않으려는 말싸움이 놀이의 중심이 된다. 그렇다고 멱살을 잡고 판을 깨는 일은 없다. 윷놀이에는 이렇게 어깃장을 잘 놓는 사람이 있어야 재미가 배가된다. 그 과정은 요즘 말로 민주주의를 훈련하는 과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첫판에 임하는 이들은 저마다 반드시 이기겠다고 벼른다. 윷놀이는 단체 경기이므로 자신의 실수가 판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 윷가락 네개를 쥔 손은 떨리고 시선은 윷을 던질 담요에 집중된다. 둘러앉은 이들이 숨을 죽인다.
윷가락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순간 ‘모야’ 하는 함성이 터진다. 그 함성은 응원가이면서 간절한 기도다. 정말 모가 나오면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지만, 겨우 한걸음에 머물고 마는 도가 나오면 윷을 던진 사람은 형편없이 초라해진다. 그때 누군가 옆에서 또 격려하는 말을 잊지 않는다. 다음에 빽도를 하면 돼!
보통 윷놀이는 삼세판을 놀 때가 많다. 삼세판은 두판도 네판도 아닌 딱 세판이라는 뜻이다. 삼세판에서 첫판은 승부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판이다. 첫판을 상대방에게 내주고 두판을 내리 이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 첫판을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승부욕이 판을 후끈 달군다. 윷놀이는 기술 싸움이 아니라 기세 싸움이다. 첫판 시작부터 기선을 제압하고 싶은 마음들이 부딪쳐 윷은 날아오르고, 소리는 왁자해지고, 놀이판은 한껏 달아오른다.
첫판을 지고 나서 풀이 죽을 필요는 없다. 첫판은 막판이 아니기에 실패하더라도 그다음에 이길 가능성이 있는 판이다. 다음판에는 꼭 이겨야 한다고 각오를 다지는 판이며 같은 편끼리 동질감이 단단해지는 판이다. 첫판을 상대에게 내줬지만 마지막에 역전해서 승리를 거머잡는 사례를 우리는 많이 목격했다. 첫판을 이겼다고 자만감에 빠졌다가 종내 신세를 망치는 경우도 적잖게 있었다.
윷놀이의 승부가 가려지고 나서 판이 시들해지면 우리 형제들은 둘러앉아 ‘나이롱뻥’이라는 화투를 칠 때가 많다. 다섯명 정도가 화투 다섯장을 들고 치는 단순한 놀이다. 헌 달력 뒷장에 숫자를 기록하고 계산하는 사람을 하나 앉혀 두어야 한다.
나이롱뻥은 손에 든 똥(11)이나 비(12)와 같은 높은 숫자의 화투를 빨리 손에서 내려놓아야 하는 게 놀이의 기본 원칙이다. 숫자를 늘리는 게 아니라 숫자를 줄여야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 재산 축적이 아니라 재산 축소가 승리의 요점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면 ‘똥뻥에 비’나 ‘비뻥에 똥’은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후련한 쾌감을 준다. 비움으로써 이기는 게 나이롱뻥이다. 화투짝을 몇시간 붙잡고 있을 필요도 없다. 스무번쯤 겨루는 첫판 한판으로 족하다.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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