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집 앞에서 추리소설 읽던 판사, 이제는 작가 도진기
판사 출신 추리소설가 도진기의 서재
편집자주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

"노래 좋아하는 사람이 '전국노래자랑'에 한번 나가 보듯 써봤는데 이렇게까지 쓰게 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일본 작가들이 여전히 주름잡는 국내 추리소설계에서 특유의 트릭과 반전으로 마니아층을 거느린 도진기(58) 작가의 말이다. 습작 기간도 따로 없이 2009년 단편소설 '악마의 증명'을 처음 썼다. 이듬해 두 번째 단편 '선택'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주관 '미스터리 신인상'을 받고, 2014년 장편 '유다의 별'로 한국추리문학대상까지 거머쥐었다. 마흔을 넘긴 나이에, 그것도 현직 판사로 재직 중 일궈냈다. 추리소설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가 벌어진 일이다. 한때 일본 추리소설 200권을 쌓아 놓고 한 권씩 독파하면서 '나도 한번 써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단다. 법관을 추리소설 작가로 만든 그 책이 무엇인지, 그를 만나 들어봤다.
40대 판사, 추리소설 재미에 푹 빠지다
지난 9일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만난 도 작가는 '변호사 도진기'가 박힌 명함을 건넸다. 그는 2017년 2월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과감히 법복을 벗었다. 첫 장편소설 '붉은 집 살인사건'의 주인공 '고진'의 입을 빌려 그 속내를 이렇게 털어놓는다. "온갖 구질구질한 절차를 거쳐서 겨우 고양이 눈물만큼밖에 처벌 못하는 법률의 굴레가 싫었어. 그래서 법원을 나와 버렸어." 고진 역시 판사로 근무하다 그만두고 변호사가 된 인물이다.

추리소설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단조롭던 그의 판사 생활에 작은 탈출구가 돼 줬다. 특히 2009년 헌법재판소에서 파견 근무할 때 왕복 2시간 지하철 통근길을 함께했던 추리소설에 푹 빠져 들었다. 책에 정신이 팔려 귀가가 오히려 늦어질 정도. "퇴근길 벤치에 앉아 후반부를 다 읽었다. 집을 바로 앞에 둔 지점이었는데, 도무지 중간에 끊고 귀가할 수가 없었다. 책을 덮을 때 비로소 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쓴 교양서 '판결의 재구성'에서) 이때 읽던 책은 교고쿠 나쓰히코의 걸작 '망량의 상자'다. 그는 "뒤가 궁금해지는 추리소설은 호기심이 강하거나 동심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지 않나 싶다"며 "대중소설 중에서도 가장 지적인 장르"라고 강조했다.
일본 추리소설 보며 "이런 걸 써보고 싶다"
거실 한 벽면을 꽉 채웠던 서가에는 소설책과 만화책이 절반씩 자리했다. 이사하면서 정리해 현재는 서재 방 하나에 1,500권가량을 남겨뒀다. 이 중 1,000권이 소설, 그중에서도 추리소설이다. '폼 나는' 어려운 책보다는 무조건 재미있는 책을 우선한 결과다. "독서는 반드시 재미있는 책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읽었던 와룡생의 '군협지'는 그에게 독서의 재미를 처음 알려준 책. 그는 "한자가 섞인 세로쓰기로 된 책이었는데도 너무 재미있어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른다"며 "무술 이름까지 외울 정도로 푹 빠졌었다"고 했다. 그 이후 중고교 때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무협지와 추리소설은 모조리 빌려 읽었다. 정작 20, 30대에는 책을 거의 안 읽었다. 40대가 되어서야 다시 만났다.
그의 '최애' 추리소설 작가는 일본의 시마다 소지. 탐정 미타라이 기요시가 활약하는 시마다의 대표작 '점성술 살인사건'은 "나도 이런 걸 써보고 싶다"고 열망했던 작품이다. 추리소설 입문자에게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을 권했다. "추리와 멜로가 이상적으로 결합된 소설"이다. 히가시노의 '백야행' '유성의 인연'은 그를 작가의 길로 이끈 책이기도 하다. 유메노 사쿠의 '병 속의 지옥'을 읽지 않았다면 추리소설 좀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도 작가는 "기괴한 환상 소설로, 절묘하게 이야기가 전개된다"며 "단편이지만 걸작이니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추리부터 법정소설까지… "SF 꼭 쓰고파"
일본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수작만 있는 건 아니었다. 졸작도 상당했다. '내가 써도 이보다 잘 쓸 수 있겠다' 싶을 만큼. 그래서 썼다. "판사든 아니든, 그게 글이든 뭐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할 수 있어요. 다만 저는 '판사가 뭘 그런 걸 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썼다는 게 남들과 달랐던 거죠." 그는 "주중에는 법의 논리에 따라 일을 하고, 주말에는 작가 마인드로 스위치해서 글을 썼다"며 "글을 쓰는 게 치유와 힐링의 과정이었다"고 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아오야마 고쇼의 코난같이, 우리나라에서도 사랑받는 탐정 캐릭터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백수 탐정 '진구'를 주인공으로 '진구 시리즈'(5권)도 펴냈다. '고진 시리즈'(5권)와 함께 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도 꼽힌다. 오로지 "재미와 시간 때우기용으로" 읽었던 추리소설이 그를 작가로 만든 것이다.

최근에는 '합리적 의심' '법의 체면' '4의 재판' 등 법정소설을 잇따라 출간했다. '법률가로서 경험이 없었다면 쓰기 힘들었을 책'이다. 물론 법조계에 몸담은 내부인으로서 직접 다뤘던 사건은 절대 소설로 쓰지 않는 게 그가 엄수하는 직업윤리. 그는 "미리 계획을 세워 쓰기보다 그때그때 쓰고 싶은 게 생기면 마음 내키는 대로 쓰는 편인데, 변호사로 법정을 드나들며 느낀 바가 많아 자연스럽게 (법정소설을) 쓰게 됐다"고 했다.

추리소설 독자들을 저버린 건 아니다. 그는 "독자 입장에서 시리즈물이 끝이 안 나는 게 싫더라"며 "진구 시리즈와 고진 시리즈는 최소 서너 권 안으로 완결을 낼 것"이라고 했다. 이미 결말 구상도 끝나 있다. 언젠가는 꼭 인공지능(AI)에 관한 SF소설도 써보고 싶다고 했다. "두 가지 마음이 계속 갈등하고 있어요. 너무 크게 성공하고 싶지는 않다…(웃음) 또 한편으론 히가시노나 미야베 미유키 같은 유명 작가들과 견줄 만큼 되고 싶다는 마음도 있고요.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네요."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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