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어로 읽는 청오 차상찬] 26.국사봉기(國士峰記)

김진형 2026. 3. 13.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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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선비’ 절의 서려 봉우리 이루니, 어찌 태산이 아니랴
역사 속 산, 높이보다 스민 마음으로 기억
국사봉 망제탑 선조 의로운 일 기념 의미
차상찬 기문서 산과 시대정신 관계 질문
고종 승하 시 의리 지킨 선비 김영하 호명
“김영하, 사람들 추앙 속 향기 남길 것”
청빈한 삶 찬미하는 비유로 글 마무리
3·1 운동 물결 국사봉 한 자락 차지
나라 무너지는 순간 버틴 마음의 기록
▲춘주열전 2권에 수록된 김영하 ‘수춘지’의 필사본.

고사리 파릇파릇하니 뜯을 만하고

샘 졸졸 흐르니 마실 만하네

돌 우뚝하니 본떠볼 만하고

동네 훈훈하니 깃들 만하네

공자가 “태산(泰山)이 무너지고 철인(哲人)이 이운다네”라고 노래하였고, 맹자가 “산이 초목 없이 벌거숭이인 것을 보면 그 나라의 흥망을 안다”라고 말하였으며, 서양인은 “히말라야를 끌어다 세계 표준으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산이 세상의 올바른 도리에 대하여 맺는 관련은 과연 어떠한가?

근래에 이른바 선비라는 자들이 혹은 ‘세상을 피하여 숨는다’고 하면서도 다시 벼슬로 나가는 자가 있고, 혹은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산다’고 하면서도 기관을 끼고 일하는 자가 있으니, 무릇 사람 중에 평소의 삶을 알기 어려운 자 또한 선비이다.

벗인 송은(松隱) 김영하(金泳河) 군은 집안이 한갓 네 벽뿐으로, 대명(大命)도 근래에 그쳐서 사방에서 입에 풀칠을 하느라 수염과 머리가 이미 하얗게 세었다. 문득 고종황제(光武皇帝)의 국상(國喪)으로 온 나라가 비통해 함을 만나게 되자, 당시 사람들이 싫어하고 세상에서 꺼려함을 돌아보지 않고 솔선하여 통곡하였다. 북두성에 기대 하늘에 부르짖으며 낙락(落落)하게 피눈물을 흘렸으니, 사람들이 예사로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이제야 비로소 이 봉우리가 있고서 이 선비가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 봉우리는 장차 수많은 산 가운데서 우뚝 서서 절로 태산의 높이가 되고, 사람들이 쳐다보며 우러르는 바가 될 것이다.

또한 선비는 장차 저절로 사람들이 존중하며 추앙하는 바가 되어 오래도록 아름다운 이름을 길이 전할 것이다.

산이 군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군이 산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군은 그야말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에 그를 위해 이렇게 노래한다.
▲ 춘천에 대한 역사 기록인 ‘수춘지’를 쓴 김영하의 묘소.

■ 해설

3·1절이 있는 3월이다. 춘천 퇴계동 인근을 지나다 무심히 바라보던 국사봉이 새삼스러워지는 달이다. 봉우리는 그리 높지 않다. 해발 203.8m. 도심 가까이에 있는 낮은 언덕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 속의 산은 높이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어떤 산은 그곳에 선 사람들 때문에 높아지고, 어떤 산은 그 위에 스민 마음 때문에 오래 남는다. 망제탑이 있는 국사봉이 바로 그런 산이다. 이 봉우리는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망국의 비애와 선비의 절의, 그리고 민족사의 깊은 울음을 간직한 상징의 장소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국사봉 망제탑 역시 선조들의 의로운 일을 기념하기 위해 1993년 12월 7일 세워진 것이다. 그러니 국사봉은 단지 옛일이 스쳐간 자리가 아니라, 후대가 끝내 잊지 않으려 한 기억의 봉우리이기도 하다.

차상찬의 ‘국사봉기(國士峰記)’는 바로 그 뜻을 일깨우는 글이다. 겉으로는 봉우리를 기록한 듯하지만, 실은 한 시대의 참된 선비가 누구인가를 묻는 글에 가깝다. 그는 산을 말하면서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통해 다시 산의 품격을 높인다. 국사봉은 풍경이 아니라 정신의 무대가 된다. 더구나 우리가 읽는 차상찬의 ‘국사봉기’는 홀로 놓인 한 편의 글이 아니다. 김영하가 1953년 완성한 ‘수춘지’에는 주진하, 성원기, 최운경, 차상찬의 기문이 함께 실려 있는데, 이는 국사봉이 한 사람의 감회를 넘어 당대 춘천 지식인들이 함께 의미를 부여한 장소였음을 보여 준다.

글의 첫머리부터 범상치 않다. 차상찬은 공자의 탄식과 맹자의 말을 끌어오고, 서양인이 말한 히말라야까지 불러내 산과 시대정신의 관계를 묻는다. 산은 단순한 흙과 바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시대에는 산이 인간의 기개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어떤 순간에는 나라의 성쇠를 상징하는 표지가 된다. 이처럼 국사봉은 처음부터 하나의 자연물이 아니라, 시대의 도리를 비추는 공간으로 호명된다.

이어 그는 선비를 말한다. 은일을 입에 올리면서도 출세를 기웃거리고, 절의를 내세우면서도 권세의 문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름은 선비이나 뜻은 이미 선비의 길에서 멀어진 사람들이다. 차상찬은 그런 이들을 뒤로하고 김영하를 참된 선비의 자리에 세운다. ‘국사봉기(國士峰記)’의 ‘국사’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한 이유다. 김영하는 단순한 향토 인물이 아니라, 차상찬이 끝내 호명하고자 한 ‘국사(國士)’, 곧 나라의 선비가 된다. 그 순간 국사봉은 나라의 선비를 품은 산이 되고, 김영하는 그 산에 걸맞은 인물로 다시 살아난다.

차상찬이 그려 낸 김영하의 삶은 궁핍하다. 집안은 사방이 벽뿐일 만큼 가난했고, 입에 풀칠하기 위해 사방을 떠돌며 살았으며, 수염과 머리카락은 이미 희어졌다. 그러나 바로 그 초라하고 가난한 선비가 고종의 승하 앞에서 시대의 눈치와 세상의 금기를 돌아보지 않고 앞장서 통곡했다는 데 차상찬의 시선은 머문다. 고종이 1919년 1월 승하하자 김영하는 고을 사람 200~300 명과 함께 국사봉 정상에 태극단을 쌓고 망제에 나섰다. 차상찬이 보기에 그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이를 수 없는 경지였다. 이 통곡은 단순한 애도가 아니다. 나라의 상실 앞에서 끝내 접지 못한 양심,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은 의리의 몸짓이다.

이 장면은 자연스레 1919년 국사봉의 풍경을 또렷하게 떠올리게 한다. 국사봉 정상에 모인 사람들은 태극단을 쌓고, 아홉 사람이 팔괘의 여덟 방향과 중앙을 맡아 소나무 아홉 그루를 손수 심었다. 그 한가운데에 김영하가 있었고, 주변 마을의 이장들이 각 방향을 맡아 뜻을 함께했다. 이는 단순한 식목이 아니었다. 온 봉우리를 하나의 의식 공간으로 만들고, 슬픔과 결의를 산의 형상 속에 새겨 넣는 상징 행위였다. 서울의 거리에서 만세가 터져 나왔다면, 춘천의 국사봉에서는 침묵 속의 통곡이 태극단과 소나무로 형체를 얻었던 셈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의식이 하루의 망제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료에 따르면 국사봉 태극단에서는 망제만 지낸 것이 아니라, 국장과 소상, 대상에 이르기까지 고을 인사들이 통곡하며 조문과 시를 지었고, 그 슬픔과 울분은 의례의 전 과정에 걸쳐 지속되었다. ‘수춘지’는 그 뒤에도 사람들이 몇 차례 더 국사봉에 올랐다고 전한다. 그러니 국사봉은 단 한 번의 역사적 장면이 아니라, 애도와 항거의 마음이 계속해서 되새겨진 장소였다.

차상찬의 시선은 마침내 산과 사람을 하나의 품격으로 묶어 낸다. 이런 봉우리가 있기에 이런 선비가 있고, 이런 선비가 있기에 이 봉우리가 더욱 높아진다는 것이다.

국사봉은 태산처럼 우뚝 설 것이고, 김영하는 사람들의 추앙 속에 오래도록 향기를 남길 것이라 했다. “산이 군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군이 산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의 대목은 그래서 오래 남는다. 장소와 인간이 서로를 빛내는 이 드문 순간에, 산은 역사의 증인이 되고 사람은 시대의 표상이 된다.

글 끝의 노래도 의미심장하다. 파릇한 고사리는 뜯을 만하고, 졸졸 흐르는 샘은 마실 만하며, 우뚝한 바위는 본받을 만하고, 따뜻한 마을은 깃들 만하다고 했다. 언뜻 산수의 찬미 같지만, 실은 선비의 삶을 떠받치는 정신의 비유다.

청빈하게 살 수 있고, 맑게 자신을 지킬 수 있으며, 굳센 절개를 본받을 수 있고, 몸과 마음을 의탁할 수 있는 곳. 차상찬은 국사봉을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삶의 윤리가 깃드는 공간으로 그려 낸다.

생각해 보면 3·1운동은 서울의 함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각 지방의 장터와 골목, 마을과 봉우리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터져 나온 슬픔과 분노, 결의와 기억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춘천의 국사봉도 그 물결의 한 자락이다.

누군가는 거리에서 외쳤고, 누군가는 산 위에서 울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울음을 시로 남겼다. 실제로 국사봉 망제탑에는 열여섯 사람의 시가 새겨져 있다. 이는 국사봉의 기억이 한 사람의 사적인 감회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가 함께 새긴 공적 기억임을 말해 준다.

오늘 국사봉을 오르는 사람들은 범상한 나무와 바람, 흙길과 낮은 봉우리를 만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장소는 풍경으로만 읽어서는 다 보이지 않는다. 먼저 기억으로 읽어야 한다. 국사봉에는 나라의 운명을 제 일처럼 슬퍼한 사람들의 눈물이 남아 있고, 김영하라는 한 선비의 기개가 서려 있으며, 그것을 다시 문장으로 세워 후세에 전한 차상찬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봉우리는 낮지만 뜻은 높다. 어쩌면 국사봉은 높은 산이어서 오래 남은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스민 울음이 깊어서 오래 남은 산인지도 모른다.

지난 3월 초, 이 글을 마무리하며 우두산 어딘가에 있다는 김영하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봉분만 겨우 남았다는 그의 묘를 찾을 길이 없었다. 며칠 후, 차상찬기념사업회의 정재경 선생님의 도움으로 김영하의 묘소를 찾았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비석과 병풍석, 상석까지 갖춰 잘 정돈되어 있었다.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제 그의 자취는 이 묘소와 함께 국사봉과 망제탑, 차상찬의 문장 속에 살아 있게 되었다.

결국 ‘국사봉기’는 한 봉우리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나라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 했던 마음의 기록이며, 한 시대의 절의가 어디에 기대어 서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글이다. 그리고 그 물음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돌아온다. 시대가 어두울 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슬퍼할 것인가. 무엇을 잊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낼 것인가. 국사봉은 오래전 그 물음을 품었고, 지금도 차상찬의 증언 아래 묵묵히 춘천 하늘 아래 서 있다.

△현대어 번역=(사)차상찬기념사업회 △해설=이현준 한림대 강사·소설가 △발췌문헌=차상찬 ‘國士峰記’. 김영하(金泳河), ‘수춘지(壽春誌·1953)’-‘산천’ 항목의 ‘국사봉’ 조항, ‘차상찬현대문선집1’ 9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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