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에 있다. 전국에 잇다]사천 매향비

임명진 2026. 3. 12.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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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 사천 땅 두 곳에서 만나는 절박한 목소리
어느새 봄기운이 완연한 사천의 해안가. 이곳에는 600여 년의 세월을 묵묵히 버텨온 두 유적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하나는 들판 위에 우뚝 선 바위 형태의 비석이고, 다른 하나는 산중턱 암벽에 깊이 새겨진 글자들이다. 31년의 간격을 두고 만들어진 이 두 유적은 모두 향나무를 땅속에 묻는 매향(埋香) 의식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하지만, 의식의 방식과 참여자,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사연은 저마다 다르다.

매향이란 미륵불이 다스리는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며 향나무를 갯벌에 묻던 불교 의식이다. 당시 사람들은 무슨 까닭으로 이 사천 해안가에 모여들어 간절한 염원을 땅속에 새겼던 것일까.
 
사천 흥사리 매향비


◇고려 말 조선 초로 이어지는 생과 사의 갈림길

매향은 말 그대로 향나무를 땅이나 갯벌 속에 묻는 행위다. 단순해 보이는 이 행위 안에는 그러나 극한의 절망과 간절한 희망이 함께 녹아 있다. 불교의 미륵 신앙에 따르면, 갯벌 속에 잠든 향나무는 천 년의 세월을 품으며 마침내 '침향(沈香)'으로 거듭난다. 그 시대에 침향은 미래의 구원자 미륵불이 이 땅에 내려올 때 올리는 가장 귀하고 성스러운 공양물로 여겨졌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절, 사천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는 왜구의 끊임없는 노략질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상태였다. 왕조 교체의 혼란 속에 중앙의 통제력은 변방에까지 닿지 못했고, 해안가 주민들은 왜구의 칼날과 가혹한 수탈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했다. 오늘을 살아낸다고 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나날이었다.

그 막막한 현실 앞에서 사람들이 붙잡은 것이 바로 '천 년 뒤의 구원'이었다. 내일조차 기약하기 어려운 처지에서도 귀한 향나무를 구해 바닷물과 민물이 뒤섞이는 갯벌에 정성껏 묻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삶이 얼마나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는지를 오히려 더 선명하게 일러준다.

왜구의 침탈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조정은 섬과 해안가 주민들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단행했다. 거제와 남해를 비롯한 남해안의 수많은 섬이 인적 끊긴 무인도로 변해갔다. 삶의 터전을 잃은 데다 혹독한 수탈까지 겹치면서 민심은 갈수록 피폐해져 갔다.

기댈 곳도, 손 내밀 곳도 없는 시대였다. 남은 것은 단 하나, 언젠가는 반드시 구원이 오리라는 믿음뿐이었다. 갯벌에 묻힌 향나무가 침향이 되는 그날, 미륵이 이 세상에 찾아와 모든 고통을 거두어 가리라는 소망, 그것이 매향 신앙의 뿌리였다.

그렇게 고려 우왕 13년인 1387년, 사천 흥사리의 갯벌에 매향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31년의 세월이 흐른 뒤, 같은 간절함을 담아 향촌동 야산 바위에 매향암각이 새겨졌다. 경남에서 매향비가 발견된 곳은 지금까지는 사천이 유일하다. 또한 매향비와 매향암각이 동일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함께 발견된 사례는 현재까지 전국에서 사천이 유일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조맹지 문화관광해설사는 "매향 의식이 사천에서만 두 곳이나 발견됐다는 것은, 그만큼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고 이를 극복하려는 민초들의 의지가 그만큼 간절하고 강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돌에 새긴 4000명의 외침 - 흥사리 매향비

흥사리 매향비는 사천시가 보유한 국가지정 보물 중 하나다. 사천시에는 조선왕조의궤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문화유산이 적지 않지만, 매향비는 보물로 지정된 유산임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낯선 이름으로 남아 있다.

흥사리 매향비는 곤양면 흥사리 산48-2번지, 사천만으로 흘러드는 가화천이 지척인 들판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간척 사업으로 넓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지만, 수백 년 전 이곳은 바닷물이 밀려들고 쓸려나가던 갯벌이었다. 향나무를 묻기에 더없이 적합한 땅이었던 셈이다. 지금도 매향비 곁에 서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바다 내음이 바람에 실려 온다.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비석들이 대체로 반듯하게 다듬어진 돌면에 단정한 서체를 새긴 것과 달리, 흥사리 매향비는 자연 그대로의 투박하고 거친 바위 면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처음 마주하면 그저 오래된 돌덩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투박한 바위가 어떻게 국가지정 보물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일까. 그 답은 바위 표면을 빽빽이 채운 204개의 글자 속에 있다.

전국에서 발견된 20여 기의 매향비 가운데서도 흥사리 매향비는 단연 눈에 띈다. 건립 연대와 목적, 참여자가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600년이 훌쩍 넘는 긴 시간, 그 비바람을 견뎌온 바위 표면에는 손가락 마디만 한 글씨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글자 크기도 제각각이고 행간도 들쭉날쭉하다. 하지만 그 불균일함이 오히려 이 비석의 진정한 가치를 말해준다. 전문 석공이 아닌 평범한 백성들이 손수 끌을 쥐고 새긴 흔적, 왜구의 위협을 피해 갯벌에 향나무를 묻으며 간절히 내일을 빌던 이들의 손길이 글자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이다.

비문 안에는 매향을 행한 목적과 시기, 참가자들의 염원이 빠짐없이 담겨 있다. 덕분에 연구자들은 이 짧은 204글자에서 고려 말 사천 지역의 사회 구조와 민간 신앙의 결을 읽어낸다. 단순한 기도의 흔적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과 두려움, 그리고 희망이 압축된 역사 기록인 것이다.

글자체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가치가 엿보인다. 관청의 손을 거치지 않고 민간에서 직접 새긴 소박한 지방 서체가 날것 그대로 살아 있어, 학계에서는 고려 후기 지방 서예를 연구하는 데 있어 흥사리 매향비를 빠뜨릴 수 없는 자료로 꼽는다. 정제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진실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 비석에서 또 하나 시선을 붙드는 것은 매향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규모다. 비문에는 '천인결계(千人結契)'라는 신앙결사 조직이 이 의식을 이끌었으며, 참여 인원이 무려 4100명에 달했다고 적혀 있었다.

조맹지 문화관광해설사는 "오늘날 기준으로도 결코 적지 않은 숫자지만, 당시의 인구 규모를 헤아리면 사실상 지역 공동체 전체가 한마음으로 뭉친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비문의 글자 대부분을 600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이 비석이 품고 있는 학술적·역사적 가치를 한층 더 깊이 있게 만들어준다.
 
사천 흥사리 매향비
사천 향촌동 매향암각


◇바위에 새긴 간절한 기도 - 향촌동 매향암각

삼천포항 인근에 향포산이라는 아담한 야산이 있다. '향기로운 포구'를 뜻하는 이름처럼 이 산은 예로부터 고즈넉한 정취를 품어왔다. 산허리에는 '처녀바위'로 불리는 커다란 암벽이 자리하고 있는데, 수백 년 동안 마을 사람들의 곁을 묵묵히 지켜온 이 바위에 뜻밖의 역사가 깃들어 있었다.

바로 조선 태종 18년인 1418년에 새겨진 '사천 향촌동 매향암각'이다. 23행 174자로 이루어진 이 기록은 당대의 사회 구조와 공동체 조직을 엿볼 수 있는 살아있는 사료다. 눈길을 끄는 것은 기록의 방식이다. 정성껏 다듬은 비석 대신, 산자락에 본래부터 놓여 있던 큰 바위 면을 그대로 활용해 글자를 새겼다. 비석을 세우려면 적잖은 비용과 품이 들지만, 암각은 자연의 돌을 빌려 쓰는 방식이다. 그 소박함 속에 오히려 민초들의 진심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다만 흥사리 매향비에 비해 보존 상태가 온전하지 않아, 세월의 풍화로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해석 가능한 글자들을 통해 밝혀진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 암각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무차수륙재'를 함께 살펴야 한다. 수륙재는 물과 뭍을 떠도는 고혼(孤魂)을 위해 베푸는 불교 의식으로,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에게 공양을 올리고 가르침을 전한다.
 
사천시 향촌동 매향암각, 붉은 부분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 사천 앞바다는 왜구의 노략질로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또한 많은 이들이 어업을 하다 조난을 당했다. 억울하게 스러진 넋을 위로하고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을 추스르는 데 수륙재는 없어서는 안 될 의례였다.

두 의식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향이 미륵이 오실 날을 기다리며 미래의 구원을 향해 손을 뻗는 의식이라면, 수륙재는 지나간 슬픔과 현재의 아픔을 보듬는 치유의 의식이었다. 그리고 두 의식을 하나로 꿰는 실이 바로 '무차(無遮)'의 정신, 즉 어떤 차별도 두지 않는 평등의 마음이었다. 미륵의 세상에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 없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그 뿌리에 있었다.

왜구의 칼날 앞에 스러져 간 원혼들을 위한 수륙재가 바닷가에서 열리던 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동시에 향나무를 깊은 땅속에 묻었다. 지금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는 세상, 미륵이 다스리는 평화로운 내일을 땅속에 새기듯 간직한 것이었다.

향촌동 매향암각은 오랜 세월 세상의 기억에서 지워져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영험한 기도처로만 전해질 뿐, 그 안에 담긴 역사는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 학계의 조명을 받으면서 비로소 600년 전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매향은 먼 훗날을 위한 약속이었다. 당장의 고통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천 년 뒤 구원의 날을 믿으며 향기를 땅속에 심어둔 것이었다. 고난 속에서도 더 나은 세상을 꿈꿨던 그 간절한 믿음은, 6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임명진기자 취재 도움=사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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