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애리의 유럽문화예술기행] '회색빛의 도시' 에든버러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로 구성된 연합 왕국(United Kingdom)입니다. 오늘은 스코틀랜드의 수도이자 '회색빛의 도시'라 불리는 에든버러(Edinburgh)로 역사·문화 탐방을 떠나봅니다.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도시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절제된 회색 풍경입니다. 현무암과 사암으로 지어진 건물들은 햇빛 아래에서도 은은한 회색을 띠고, 흐린 날에는 하늘과 건물이 거의 구분되지 않을 만큼 묵직한 색조로 가라앉습니다.
그 차분한 색채는 시간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중세와 근대가 겹겹이 쌓인 역사 도시, 에든버러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역사 무대처럼 펼쳐져 있으며,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모두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도시의 상징은 바위산 '캐슬 록(Castle Rock)' 위에 세워진 '에든버러 성(Edinburgh Castle)'입니다. 왕들의 거처였던 에든버러 성에서 시작해 홀리루드하우스 궁전 (Palace of Holyroodhouse)까지 이어지는 중심 도로가 바로 '로열 마일(Royal Mile)'입니다. 과거 왕과 왕족이 행차하던 이 돌길은 오늘날에도 도시의 중심축을 이룹니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클로즈(close)'라 불리는 좁은 통로들이 미로처럼 펼쳐지며, 과거로 들어서게 됩니다. 중세 상인의 흔적들이 보이고 건물 벽면에는 오래된 문장들이 남아 있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에든버러는 유럽 지성사의 중요한 무대로 부상합니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과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이 도시에서 활동하며 근대 사상의 토대를 다졌습니다.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작가 월터 스콧(Sir Walter Scott)은 <아이반호(Ivanhoe)>를 통해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전통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습니다. 그를 기리는 60미터에 이르는 '스코트 기념탑(Scott Monument)'이 신시가지에 우뚝 솟아 있고, 첨탑 아래에는 스콧이 애견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에든버러가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 곧 '북쪽의 아테네'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러한 이상은 '칼턴 힐(Calton Hill)'을 고전주의 양식의 신전과 기념비로 채우려는 도시계획으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건물이 '스코틀랜드 국립 기념관(National Monument of Scotland)'입니다. 이 미완의 구조물은 한때 '스코틀랜드의 수치'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동시에 계몽주의 시대에 에든버러가 꿈꾸었던 고전적 이상과 지적 자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칼턴 힐에는 아테네의 원형 신전을 모델로 한 계몽주의 철학자 '더걸드 스튜어트의 기념탑(Dugald Stewart Monument)', 그리고 18세기 말 과학적 관측을 위해 건립된 '시립 천문대 (City Observatory)' 등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들은 에든버러가 '북쪽의 아테네'라 불리게 된 배경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칼턴 힐이 단순한 전망 지점을 넘어 사유와 관찰, 그리고 계몽의 이상을 구현한 공간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여름이 되면, 이 차분한 회색 도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합니다. 에든버러는 활기 넘치는 '페스티벌의 도시'가 됩니다. 국제 페스티벌과 프린지 페스티벌을 중심으로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대로 바뀌고, 로열 마일과 광장, 대학 강당과 교회, 심지어 작은 지하 공간까지 공연장이 됩니다.
거리에는 형형색색의 포스터가 빼곡히 붙고, 배우들은 분장을 한 채 전단을 건네며 관객을 맞이합니다. 백파이프 연주가 울려 퍼지는 사이 곡예사와 마임 배우, 즉흥 코미디 팀이 돌길 위에서 관객을 모읍니다.
낮에는 햇살을 머금은 돌바닥 위로 각국의 언어가 뒤섞여 흐르고, 카페와 펍은 공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가득 찹니다. 해가 지면 성과 건물들이 조명에 둘러싸이며, 광장에서는 밤늦도록 음악과 박수가 이어집니다.
이처럼 에든버러는 왕국의 수도로서의 정치적 상징성, 계몽주의 도시로서의 지적 전통, 그리고 국제 예술 도시로서의 문화적 역동성을 동시에 지닌 공간입니다.
화산 지형 위에 세워진 견고한 성채와 질서 정연한 신시가지, 그리고 축제로 생기를 더하는 거리까지-에든버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스코틀랜드의 얼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애리 전 수원대학교 유럽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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