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불안을 감지하자, 삶이 다시 작동했다[책과 삶]
조경란 지음
문학동네 | 332쪽 | 1만8000원

사라진 어머니 찾아 나선 딸, 교수 임명 좌절에 복수하려는 강사…
‘등단 30년’ 소설가 조경란의 이상문학상 대상작 등 단편 7편 실어
노인성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대학 강사 ‘영서’는 어느 날 말없이 집을 나간 어머니를 찾아 나서며 어린 시절 살던 동네와 유년의 기억을 떠올린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새벽, 오줌을 싼 이불을 동네 개천에 몰래 갖다 버린 기억, IMF 사태로 가세가 기울며 학업에 어려움을 겪었던 아픔과 아마도 그때 이후 다정함을 잃은 어머니,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변한 산동네의 이웃들까지. 수십년 전의 일들이 어제처럼 생생한 건 영서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어서, 그와 같은 시간을 고스란히 통과한 존재를 떠나지 못하고 있어서다.
이번달 도시가스 요금과 줄어드는 강의 시간을 걱정하는 영서의 삶은 불안과 돌봄의 무게가 뒤섞여 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사실을 알았을 때 영서가 묘한 홀가분함을 느낀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어머니가 삶을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해오며 영서는 깨닫게 된다. 자신을 옭아맨다고 생각했던 불안과 염려는 곧 스스로를 버리지 못하도록 만든 힘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올해 등단 30주년을 맞은 소설가 조경란의 신작 소설집 <반대편 사람 주의>는 타인을 향한 불안과 염려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사라진 어머니를 찾아 나선 딸의 이야기를 담은 ‘은천에서’를 비롯해 2024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일러두기’와 같은 해 김승옥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그들’ 등 7편의 소설이 실렸다. ‘영서’ ‘종소’ ‘양지’ 등 각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공유하며 서로의 이야기 속을 스쳐 지나간다. 단편집임에도 연작처럼 읽히는 이유다.
주인공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졌다. 사십 대 후반의 대학 강사라는 점은 그중 하나다. 불안정한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에 위축된 그들의 삶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이 공기처럼 따라다닌다. 강단에 서 있지만 안정된 교수직을 얻지 못한 채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놓여 있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거나 어린 조카들을 돌본 경험이 있다는 점도 닮았다.
‘그들’의 주인공 ‘종소’도 그런 인물이다. 교수 임용에서 번번이 좌절을 겪은 그는 자신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행동했던 최 교수에게 복수할 마음으로 그의 아내 영주가 운영하는 카페를 찾아간다. 그러나 뜻밖의 사고로 계획은 어이없이 틀어지고, 상황은 허무하게 끝난다. 종소의 찢어진 바지 주머니를 알아보고 말없이 꿰매주는 영주의 친절은 그의 삶에 작지만 묘한 온기를 남긴다.
외롭고 위태로운 주인공들은 삶의 가장자리에서 버티고 있다는 자각 속에서 자신이 왜 이런 삶에 이르렀는지 돌아본다. ‘일러두기’의 주인공 ‘미용’은 다른 방식으로 과거와 마주하는 인물이다. 작은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미용은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이 겪었던 상처의 경험들을 글로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복사집 주인인 이웃 ‘재서’는 우연한 기회에 미용의 글을 읽게 되고 그의 고통을 느끼게 된다.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재서에게 미용은 전한다. 자신이 진짜 쓰고 싶었던 것은 고통이 아니라 학창 시절 교정에서 보았던 복사나무 꽃잎의 아름다움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인물들은 모두 삶의 어느 지점에서 한번쯤 죽음을 상상해본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과거에 실제로 삶을 포기하려 했고, 누군가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영서는 “자신의 죽음을 떠올려보지도 그려보지도 않는 사람과는 깊은 감정을 나누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 죽음 충동을 파국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물들이 서로의 불안을 감지하는 순간, 삶이 다시 작동하는 장면을 포착한다. 사라진 사람을 찾아 나서거나(영서, 양지, 재서), 누군가를 걱정하며 지켜보거나(재서, 영주), 혹은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감지하는(종소, 미용과 재서), 길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발견한 작은 틈 사이로 빛이 스며드는 순간들이다.
권희철 문학평론가는 해설에서 이들의 관계를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죽음 충동을 통해 상대방의 죽음 충동에 공명하며 그 존재를 염려하고 붙드는 특별한 관계’라고 설명한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서로의 취약함을 알아보는 순간 추락할 듯 위태로웠던 인물들의 세계는 다시 삶 쪽으로 기울어진다.
극적인 구원이나 낙관은 없다. 인물들은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작은 친절을 건네거나, 잠깐 마주 앉아 기억을 나눌 뿐이다. 그 짧은 접촉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어떤 순간은 힘겹게 하루를 버텨내는 누군가를 다시 살게 할 기적이 된다.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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