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트세대, 알파세대를 위한 대학 [노정혜 칼럼]

한겨레 2026. 3. 12.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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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거의 대부분의 지적 활동을 대신 해주고, 그 인공지능과 손잡고 미래를 경영할 젊은 세대는 교수들과 눈도 마주치기 어려워하는 이 시대에, 언제까지 논문 숫자만 세는 평가제도를 운용할 것인가. 무표정한 응시 속에 웅크리고 있는 젊은 세대들과 소통이 가능한 강의실을 살려내지 않으면, 우리의 대학은 존재가치가 없다.

노정혜 |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얼마 전 연구와 교육에 모두 열심인 후배 교수가 넋두리하듯이 괴로움을 호소했다. 학부생들 수업하러 강의실에 들어갔다 나오면 온몸에 진이 빠져 하루 종일 생산적인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후배들이 의외로 많았다.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의 무표정한 얼굴 앞에서, 어떤 농담과 읍소에도 반응이 돌아오지 않아 해가 갈수록 막막함이 더해진다고 한다. 배움에 대한 기대 없이 학위만 받아서 대학을 졸업하는 게 목표가 아닌가 싶다는 진단을 덧붙인다. 서울의 유수 대학이건 지방의 거점 국립대학이건 비슷한 현상을 목도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현재 10대 중반부터 20대 전체를 아우르는 제트세대(대략 1997~2012년생)가 흔히 내보이는 무표정 무반응의 응시는 그들의 윗세대에게는 마주하기 괴롭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들이 오프라인에서는 감정의 표현을 최소화하는 대신, 온라인에서는 온갖 이모지와 문자로 활발한 표현을 즉각적으로 하는 디지털 세대라는 것을 상기하면, 이 현상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세대 간 격차의 한 단면일 수 있다. 기록문화의 시초에 해당하는 4000년 전 점토판에 ‘꼰대’ 아버지가 열심히 배우지 않고 게으름 피우는 아들에 대해 절절한 훈계와 한탄을 설형문자로 새겨놓은 것을 보면 요즘의 어린 자식을 대하는 부모들의 심정과 전혀 다르지 않다.

윗세대가 이해하기 어려운 요즘의 젊은 세대를 미래의 주역으로 길러내야 하는 오늘날의 대학과 교수들은 지금 대학이라는 기관과 교수라는 직업의 유지를 위협하는 큰 도전에 봉착해 있다. 여태까지 해오던 대로의 교육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막다른 벽에 부딪혔고, 바뀌지 않으면 도태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막다른 상황에서는 변해야 하고, 변하면 길이 열리고, 그래야 오래간다는 주역의 원리가 요즘처럼 절감되는 때가 없는 것 같다.

대학은 전문적인 지식을 교육하고 인증하는 학위수여 기관으로 시작되었다. 이슬람 문화권인 모로코에서 859년에 설립된 카라위인 대학, 기독교 문화권인 이탈리아에서 1088년에 설립된 볼로냐 대학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평가받는다. 신학과 법학 위주로, 교리를 수호하는 지성의 전당 구실을 해온 중세의 대학은 16세기 이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바뀌어 갔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여러 학문 분야가 더해지며 교과 내용이 다양해졌고, 교회와 분리되어 지식을 수집하고 보전하며 후대에 전수하는 중심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과학혁명을 일으킨 새로운 발견들은 많은 경우 대학 밖에서 개별 학자들과 그들의 네트워크인 학회들의 생태계에서 이루어졌다.

대학이 지식을 창출하는 연구를 통해 학생을 교육한다는 새로운 사명은 1810년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설립을 기점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교육자이자 행정가인 빌헬름 폰 훔볼트는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핵심을 교육의 혁신으로 보았고, 개인의 자율성과 이성의 힘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의 정신을 교육의 바탕으로 삼았다. 대학은 학생이 스스로 사고하고 탐구하는 자율적 학습 공간이어야 하고, 연구와 학습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고등교육 모델이 제시되었다. 독일의 대학들이 19세기에 세계 최고의 학문을 이끌어간 배경이 여기에서 배태되었다.

교육과 연구가 통합된 훔볼트식 대학 모델은 미국으로 전해졌고, 1876년 독일식 대학원과 박사학위 등을 도입한 미 존스홉킨스 대학을 필두로 하버드·시카고 대학 등 연구중심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19세기 후반 미국은 독일식 모델을 더 실용적으로 변형하여 연방정부가 각 주에 토지를 기증해 주립대학을 설립하게 하고, 농학과 공학·군사학 등 실용 학문 분야를 발전시켰다. 교육 대상도 소수 엘리트에서 중산층으로 확대하여 대학이 국가의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몫을 더 키웠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더 부각되어 연방정부가 대학의 연구를 대규모로 지원하게 되었다.

이제 연구를 통한 지식의 창출은 대학원을 갖춘 세계 모든 대학의 필수 임무가 되었다. 지식의 창출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산업을 여는 동력이 되었고, 이제는 국가의 경쟁력을 나타내는 주요 지표가 되었다. 그에 따라 대학과 교수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논문과 특허 등 연구 업적을 정량화한 수치로 이루어지게 된다. 대부분의 종합대학에서 교수들은 승진과 연구비 수주를 위한 논문을 출판하기 위해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넣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의 가장 근본적 사명인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나. 인공지능이 거의 대부분의 지적 활동을 대신 해주고, 그 인공지능과 손잡고 미래를 경영할 젊은 세대는 교수들과 눈도 마주치기 어려워하는 이 시대에, 언제까지 논문 숫자만 세는 평가제도를 운용할 것인가. 오늘날 대학 연구의 시발이 되었던 훔볼트식 개혁은 연구를 통해 학생들을 교육하고, 스스로 탐구하고 성장하는 자율적 인간으로 길러내는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대학 연구는 연구 결과가 가져올 경제적 가치가 최우선시되면서, 스스로 탐구하고 연구하는 학생을 길러내는 임무는 뒷전으로 밀어내는 본말 전도의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무표정한 응시 속에 웅크리고 있는 젊은 세대들과 소통이 가능한 강의실을 살려내지 않으면, 우리의 대학은 존재 가치가 없다. 유치원에 가기 전부터 명문 대학을 목표로 들이미는 학부모들의 진학지도는 이력서의 학력란 한줄을 채우기 위한 무모한 투자일 뿐이다. 모든 지식을 인공지능이 섭렵한 이 시대에 대학의 학위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기성세대들이 이해하지 못할 변화의 소용돌이를 헤쳐 갈 오늘의 젊은 세대들이 대학에서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 살려내며 인공지능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대학은 이 시대의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부응할 혁신을 위해, 대학은 교육의 성과를 질적으로 평가할 방법을 찾아야 하고, 학생들의 성장을 끌어내는 교수와 강사들에게 큰 인센티브를 주어야 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의 불안과 기대에 공감하며 소통할 수 있어야 그들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다. 그들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젊은 강사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배움의 과정을 즐길 수 있도록 수업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분명 쉽지 않은 변화이다. 그러나 지금 바뀌지 못하는 대학은 과거의 영예만 붙들고 사라져 갈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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