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들] “유부인줄 몰랐어요”, 면피용 변명인가 정당한 항변인가

"유부인줄 몰랐어요."
상간에 의한 위자료 청구소송을 수행하다 보면 피고 측으로부터 가장 빈번하게 듣게 되는 항변 중 하나다. 원고(배우자)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노릇이다. 내 가정을 파탄 낸 상대방이 이제 와서 '몰랐다'는 말 한마디로 책임을 회피하려 든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률가의 시각에서 이 문장은 단순한 변명을 넘어, 민법상 손해배상책임의 성립 여부를 가르는 핵심적인 법리적 쟁점을 담고 있다.
우리 민법 제750조는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기 위해 가해자의 '고의 또는 과실'을 필수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가정을 흔들었다는 결과만으로는 부족하며, 상대방이 배우자가 있는 자임을 알았거나(고의), 알 수 있었음에도 부주의하여 알지 못한 경우(과실)에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현대 사회에서 미혼 남녀 간의 로맨스는 개인의 자유 영역에 속하며 법적으로 아무런 과오가 없다. 만약 상대방이 작정하고 미혼인 것처럼 행세하며 접근했고, 그 거짓말에 속아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까지 '가정 파탄의 주범'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금전적 배상을 요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법의 정의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소송전은 그리 간단치 않다. 진실로 속은 피해자와, 속은 척 연기하는 가해자를 가려내는 과정은 마치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다. 최근 하급심 판례의 경향을 살펴보면, 단순히 "몰랐다"는 주장만으로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법원은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된 기간, 만남의 장소와 시간대, 주고받은 메시지의 내용, SNS상의 정보 등을 종합하여 '과연 일반적인 주의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대의 기혼 사실을 눈치챌 수 없었겠는가'를 엄격히 따진다.
예컨대 상대방이 주말마다 연락이 두절되거나 명절 및 기념일에 만남을 피했다면, 혹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아이나 배우자의 흔적이 역력함에도 이를 간과했다면 법원은 '과실'을 인정하여 위자료 책임을 지우는 편이다. 반면, 상대방이 위조된 혼인관계증명서를 보여주었거나, 가족과의 통화를 연출하는 등 치밀하게 기망한 사실이 입증된다면 피고는 위자료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법과 도덕의 경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원고 입장에서는 피고가 '몰랐을 리 없다'고 확신하지만, 법정은 심증이 아닌 증거로 말하는 곳이다. 반대로 피고 입장에서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알고 보니 사기꾼이었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위자료 청구 소송의 피고라는 불명예를 감당해야 하는 이중고에 처하기도 한다.
결국 상간 소송에서 "몰랐어요"라는 항변은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방어권 행사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가슴에 대못을 박는 2차 가해가 된다. 변호사로서 이 과정을 지켜보며 느끼는 점은, 사랑의 끝이 법정으로 이어질 때 그 중심에 있어야 할 것은 단순한 감정적 비난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관계에 기초한 책임의 분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너무 법률가적인 생각인가?
기혼 사실을 숨기고 접근한 자의 파렴치함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고 그가 져야 할 법적 책임 또한 무거워야 한다. 그러나 그 거짓말의 그물에 함께 걸려든 제3자에게까지 무조건적인 연대책임을 묻는 것은 우리 민법이 지향하는 과실책임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법은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억울한 가해자를 만들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법정 복도에는 "정말 몰랐다"는 호소와 "거짓말 마라"는 고함이 교차한다. 이 혼란스러운 공방 속에서 법원이 내리는 판결 한 줄은, 단순히 돈 몇 천만 원의 향방을 정하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가 '개인의 자유'와 '가정의 보호'라는 두 가치를 어떻게 조율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김경돈 법무법인 해담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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