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뜨리고 다듬고, 돌에 스며든 역사…42cm 주먹찌르개 첫 공개
1978년 그레그 보웬 보고서·서신 등 눈길…5월 '땅속의 땅' 특별전
전곡리 유적, 세계유산 등재 추진…"구석기에 담긴 이야기 주목해야"

(연천=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2021년 경기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85-12번지, 아파트 건설 공사를 앞둔 부지에서 발굴 조사가 한창이었다.
조사가 예정된 부지 규모는 약 1만4천㎡.
구획을 나눠 시굴 조사와 발굴 조사를 진행하던 조사단 앞에 다양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됐다. 유물층마다 적게는 40여 점, 많게는 1천여 점이 발견됐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길이가 42㎝에 이르는 커다란 석기였다.

약 25만∼20만 년 전에 형성된 지층에서 출토된 석기는 주먹찌르개로 분류되는 형태로, 무게가 약 10㎏에 달했다.
국내외 학계에서 알려진 어느 유물과 비교해도 크기가 압도적이었다. 소식이 알려지자 구석기 연구자들이 앞다퉈 찾아와 석기를 살펴봤다고 한다.
유럽, 아프리카 등 주요 구석기 유적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초대형 석기가 박물관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 연구를 대표하는 연천 전곡리 유적 일대에 세워진 경기문화재단 전곡선사박물관의 상설전시실에서다.

이한용 전곡선사박물관장은 12일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전곡리 일대 24차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초대형 주먹찌르개 등 유물을 처음으로 공개"한다고 밝혔다.
주먹찌르개는 주로 한쪽 면의 끝을 뾰족하게 만든 석기를 일컫는다.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주먹도끼와 함께 대형 석기로 분류된다. 석기의 앞·뒷면을 모두 다듬어 날을 세운 주먹도끼와 달리 주먹찌르개는 단면 석기 형태다.
전시를 기획한 김소영 학예연구사는 "이 정도 크기의 초대형 주먹찌르개 발견은 처음"이라며 "고인류의 도구 제작 목적을 새롭게 해석하는 결정적 단서"라고 강조했다.

기존에 발견된 구석기 유물과 비교하면 독특한 점이 많다.
전곡리 일대에서 발견된 주먹도끼 등은 주로 단단하고 질이 좋은 규암 자갈돌로 만들어졌으나, 이 석기는 입자가 굵고 떼어내기 힘든 화강편마암으로 만들어졌다.
학계에서는 외부에서 석기를 제작해 반입한 것으로 추정한다.
박물관 측은 "한탄강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감 종류"라며 "유사한 형태와 크기의 화강편마암 자갈돌도 발견돼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새로 단장한 상설전시실에서는 함께 출토된 다양한 석기도 만날 수 있다.
돌덩어리를 의도적으로 타격하거나 눌러서 떼어 낸 돌조각을 일컫는 격지, 몸돌, 가로날도끼, 작은 크기의 주먹찌르개 등이 소개된다.
1979∼1981년 전곡리 초기 발굴 조사에서 찾아낸 다양한 석기류도 함께 전시돼 전곡리 땅에 스며든 역사를 비춘다.
김 학예연구사는 "초대형 주먹찌르개뿐 아니라 다양한 석기 유물이 함께 발견된 점을 주목할 만하다"며 향후 유적의 최초 형성 시기 등을 밝힐 단서가 되리라 봤다.

전시장에서는 1992년 발굴 조사 현장도 만나볼 수 있다.
1978년 당시 동두천에 주둔하던 주한 미군 병사인 그레그 보웬이 주먹도끼를 발견해 기록한 흔적, 세계적 발견에 놀라워한 학자들의 서신 등도 처음 공개된다.
보웬이 당시 영남대 정영화 교수에게 보낸 영문 편지에는 두 사람이 만날 장소로 '동두천 시외 뻐스(버스) 종점'이라고 한글로 적혀 있어 눈길을 끈다.
그 시절 발굴 현장에서 쓰던 각종 도구, 유물장 열쇠 꾸러미 등도 흥미롭다.
박물관은 구석기 문화를 보다 쉽게 설명하려고 곳곳에서 신경 썼다.

석기의 크기가 왜 작아졌는지, 구석기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몇 명이었는지 등 관람객이 궁금하게 여길 내용을 정리하고 최신 연구 성과도 설명했다.
김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 개편은 구석기 콘텐츠와 전곡리가 가진 방대한 학술적 성과를 대중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고민한 결과"라고 말했다.
박물관은 초대형 주먹찌르개를 누가, 왜, 어떻게 썼는지 연구 중이다.
석기에 남은 흔적과 쓴 자국을 바탕으로 조사하고 있으며, 올해 5월 박물관 개관 15주년을 기념해 준비 중인 '땅속의 땅, 전곡' 전시에서 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이한용 관장은 "전곡리의 구석기 유물은 약 30만년 전 이 땅을 살아간 사람들이 자연을 이용해 만들어낸 기술적 산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연천 전곡리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고 이 관장은 전했다.
전곡리 유적 일대 약 80만㎡(24만여 평) 규모가 사적으로 지정돼 있고, 박물관 전시와 매년 열리는 구석기 축제 등을 통해 선사 문화를 알리려는 노력도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이 관장은 "국내에서는 아직 석기 유물이 국보, 보물 등 지정유산이 된 사례가 없다"며 "앞으로 구석기에 담긴 이야기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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