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살인자’에게 죽는 여자들,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읽는시간]

남지원 기자 2026. 3. 1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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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x김영사 북토크 ‘읽는시간’
①<이처럼 친밀한 살인자> 허민숙 입법조사관
밤길이 뭐가 무섭다는 거냐. 한국 밤길은 세상에서 제일 안전하다.

여성살해와 여성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등장하는 반론입니다.

하지만 사실 한국 여성들에게 가장 위험한 공간은 밤길이 아니라 가장 안전해야 할 내 집이나 애인과의 내밀한 공간입니다. 2025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애인 등 파트너에게서 신체적·성적·정서적 폭력, 통제 피해를 평생 한 번 이상 경험한 성인 여성 비율은 19.2%로, 5명 중 1명꼴이라고 합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매년 3·8 여성의 날 발표하는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한 해 동안 남편이나 애인 등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언론에 보도된 것만’ 137명에 달하죠.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이 최근 발간한 책 <이처럼 친밀한 살인자>는 교제폭력과 교제살인의 원인과 실태를 들여다보고 이를 막기 위한 실질적 대책을 찾아보는 책입니다. 11일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과 출판사 김영사는 북토크 ‘읽는시간’을 통해 허 입법조사관을 모시고 책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허 입법조사관은 “공권력이 피해자들을 구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무엇이 중요한 경고인지, 어떻게 위험을 알아차릴 수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플랫]“교제폭력은 여성을 폭행·살해하면 ‘용서받을 수 없음’을 보여주지 못해 나타난 결과”

폭행과 살인의 전조 ‘강압적 통제’
1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열린 북토크 ‘읽는시간’에서 허민숙 입법조사관이 강연을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책은 ‘강압적 통제’라는 개념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한 TV 프로그램에 부부가 나왔어요. 남편은 홈캠을 설치해 놓고 항상 아내를 지켜봅니다. 그리고 말하죠. “너 지금 왜 놀고 있어? 너 공부해야 하는 거 아냐?” 아침이면 몸무게를 재도록 하고, 운동을 시키겠다며 같이 달리기를 하죠. 아내를 사랑해서 자기계발과 건강까지 챙겨주는 걸까요?

방송은 대수롭지 않게 다뤘지만 사실 이것은 매우 커다란 위험 신호라는 게 허 입법조사관의 지적입니다. 교제폭력의 가장 큰 위험징후인 ‘강압적 통제’에 해당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강압적 통제는 연인이나 배우자처럼 가까운 관계에서 한쪽이 상대의 일상을 지나치게 통제하고 사소한 일까지 허락을 받게 하거나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강요하는 것입니다. 강압적 통제는 친밀한 관계 폭력의 명확한 전조입니다. 피해자들은 폭행에 앞서 강압적 통제를 겪는 경우가 많거든요.

실제로 남자친구로부터 모텔에서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한 여성은 ‘다른 사람 만나지도 접촉하지도 않기’ ‘대학교 가지 않기’ ‘유튜브 하지 않기’ ‘씻거나 신발 벗는 등 행동 허락받고 하기’ 등의 내용이 담긴 각서를 썼다고 해요. 지난해 경기도 화성의 한 오피스텔에서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친한 친구를 1년에 딱 3번만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와 함께 있는지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하는 가해자도 있었죠.

교제폭력의 배경, 문화적 지배

우리는 왜 이런 통제를 위험신호로 보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까요? 허 입법조사관은 “헌법과 현행법 체계가 성평등을 보장하는 반면 문화적 수준이 그에 따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대중매체에서 여성은 대체로 ‘개념 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혹은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역할을 맡죠. 반면 남성은 전문가이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으로 재현돼요.

드라마에서 로맨스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가는’ 장면에서 시작될 때가 많죠. 수많은 ‘손목잡기 신’을 화면에 띄우며 허 입법조사관은 말했습니다. “이건 폭행이고 성추행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드라마가 여성이 남성을 고소해서 승소하는 걸로 끝나나요? ‘오빠가 날 너무 사랑했던 거야’ 이렇게 끝나잖아요.” 남성이 여성을 통제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문화적 지배’가 교제폭력과 강압적 통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한다는 분석입니다.

1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열린 북토크 ‘읽는시간’에서 허민숙 입법조사관이 강연을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허 입법조사관은 ‘교제폭력과 교제살인 가해의 구조적 배경이 무엇이냐’는 청중 질문에 이렇게 답했어요. “가해자는 미친 사람이 아니고, 피해자는 이를 알아보지 못한 아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국가는 할 게 없어요. 교제폭력이 ‘미친 남자’와 ‘운이 나쁜 여자’의 문제라면 어떻게 여기에 국가가 개입할 수 있겠어요? 가해자의 행동을 정신병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 행동의 밑바닥에는 혐오가 깔려 있어요. ‘내 여자라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벌할 권리가 나에게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가해자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구조를 바꾸는 거,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죠.”

허 입법조사관은 성폭력과 교제폭력에서 ‘피해자로 인정받는 피해자상’이 완전히 정반대라는 점도 지적했어요. “정말 이상한 게 뭔지 아세요? 성폭력은 적극적으로 미친 듯이 저항하기를 피해자에게 원해요. 하지만 가정폭력이나 교제폭력에서는 가해자에게 저항하다가 가해자가 ‘나도 맞았다’고 하면 쌍방폭행이 돼요. 그러니까 국가는 이 폭력의 본질이 뭔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아예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개인은,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피해자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뭘까요? 헤어져라. 제발 그만 만나라고 이야기를 하죠. 하지만 피해자들은 결별 과정에서 주로 살해됩니다.” 허 입법조사관은 책에서도, 북토크에서도 피해자가 ‘거부의 의사 표현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위험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헤어지자고 했을 때 상대가 가장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경험하는 과정에서 결별을 망설이게 되기도 하죠.

주변 사람들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 있지만, 피해자를 혼자 두지 말아 달라고 허 입법조사관은 거듭 당부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연락이 끊기고 고립된 피해자는 통제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주변에 교제폭력 피해자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허 입법조사관은 “고립되기 쉬운 피해자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나한테 연락하고 털어놓으라고 해도 좋고, 가해자가 휴대전화를 부숴서 증거를 없앨 수 있으니 피해 사진을 전송하라고 하는 것만으로도 증거를 모으는 데 도움이 됩니다. 상담센터 정보를 알려주셔도 좋고요.”

1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열린 북토크 ‘읽는시간’에서 허민숙 입법조사관과 참가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준헌 기자

가장 많이 변해야 하는 것은 공권력이겠죠. 지금처럼 “사건 접수하실 거냐”고 묻는 대신 피해자가 ‘강압적 통제’ 상황에 놓여있었는지를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우선 살펴야 한다고 허 입법조사관은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강압적 통제가 문제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할 필요도 있습니다. 호주에서는 2020년 해나 클라크라는 이름의 한 여성이 세 자녀와 함께 전 남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후 강압적 통제를 범죄화하는 법률이 제정됐습니다. 그냥 법이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통제다(It’s not love, it‘s coercive control)’라는 메시지를 담은 대대적인 홍보도 함께 진행됐다고 해요.

[더 이상 한 명도 잃을 수 없다 - 번외편]“‘강압적 통제’부터 ‘교제폭력’으로 보는 호주, 젠더폭력의 ‘공적 개입’ 강조해”

[더 이상 한 명도 잃을 수 없다] 교제 관계, 모호해서 처벌 불가? 해외에선 ‘이렇게’ 한다

한국에는 아직 ‘교제폭력’을 정의한 법조차 없습니다. 허 입법조사관은 2024년 호주 멜버른대 로스쿨에서 연수를 하면서 교제폭력 법률이 제정되는 모습을 보며 ‘왜 우리는 이렇게 못하지’라는 생각에 슬펐다고 합니다. 경찰 수사기록이나 판결문을 검토하다 보면 정말 지치고 고통스럽고 아프다고 해요.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으면’ 사회는 분명 바뀔 거라고 허 입법조사관은 강조했습니다. 범칙금 8만 원짜리 경범죄였던 스토킹 행위를 처벌하는 스토킹처벌법이 제정된 것처럼요. 지금도 국회에는 교제폭력 관련 법안이 14건 올라가 있습니다.

북토크에 참여하신 한 여성단체 활동가가 질의응답 시간에 폭력 피해자들이 ‘쌍방폭행’으로 입건되는 게 너무 답답하다고, 우리에게 희망이 있겠느냐고 질문하셨는데요, 허 입법조사관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지금 22대 국회에 올라가 있는 교제폭력 관련 법안들이 또 임기 만료 폐기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23대 국회가 열리면 새 의원들이 예전에 폐기됐던 법들 또 들여다볼 겁니다. 물론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다음 세대 여성들에게, 딸들에게는, 손녀들에게는 정당방위가 있는 그런 사회를 물려줄 거예요. 다만 그 속도를 빨리 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희망이 있겠느냐고 질문하셨죠? 있게 할게요.”

▼ 남지원 기자 somnia@khan.kr

남지원 기자 somni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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