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의 광기부터 베드로의 통곡까지…3년의 기다림, 헛되지 않았다 [고승희의 리와인드]
김선아 지휘 콜레기움 보칼레, 무지쿰
‘키아즘’ 구조로 살펴본 십자가의 신비
![김선아 지휘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과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의 ‘마태수난곡’ [프레스토컴퍼니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3/ned/20260313002208144ecnp.jpg)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오라! 딸들아! 나와 함께 슬퍼하자” “보라! 누구를? 신랑을! 그를 보라! 어떻게? 어린 양처럼!” (바흐 ‘마태수난곡’ 제1곡 합창)
합창단이 질문하고 답을 하듯 역할을 나눈다. 무대를 중심으로 양쪽에 선 합창단은 서로 대화하듯, 와서 보라고 소리치고, 무엇을 보라는 것이냐며 묻는다. 그 순간 공연장은 극장이 됐다. 이것은 그리스 비극보다 비극적이며, 오페라나 뮤지컬보다 드라마틱한 격정과 속죄의 서사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2026년의 수난절에 찾아온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관객들을 300년 전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로 데려갔다. 한국 고음악계에서 선구적 역할을 해온 김선아 지휘자가 이끄는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Collegium Vocale Seoul)과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Collegium Musicum Seoul)이 3년 만에 다시 올린 무대다. 이날의 공연은 서양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 작품’을 감상하는 자리를 넘어 인간 존재의 심연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1727년 초연된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예수의 수난 과정에 대한 작곡을 의뢰받은 바흐가 남긴 역작이다. 바흐가 세상을 떠난 이후, 이 곡 역시 ‘수난사’를 겪었으나 멘델스존이 1829년 베를린에서 공연하며 다시 세상에 나왔다. 이날은 클래식 음악사에서 ‘바흐 르네상스’의 출발이자, ‘고음악 연구’가 태동한 날이기도 하다.
김선아가 지휘한 이번 공연은 국내 민간 단체가 바흐의 역작을 ‘시대 악기’로 온전히 구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선아와 콜레기움 보칼레,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은 ‘3년에 한 번씩’ 마태수난곡을 올리겠다는 선언과 함께 한없이 높은 봉우리를 정복하기 위해 수년간 이 곡을 탐구했다. 18세기 고음악 연주 관행은 물론 신학적 배경, 거대한 정신과 메시지를 담기 위해 지휘자와 연주자들은 끊임없이 비움과 채움을 반복했다.
![김선아 지휘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과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의 ‘마태수난곡’ [프레스토컴퍼니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3/ned/20260313002208528wawg.jpg)
‘마태 수난곡’은 바흐의 음악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건축물로 꼽힌다. 곡은 3중 텍스트로 정교하게 세워졌다. 성경과 시, 찬송(코랄)으로 구성, 장장 3시간을 내달리는 구성이다. 단순히 성경을 낭독하는 것을 넘어서는 이 구조를 통해 바흐는 청중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에 이르는 사건을 가장 먼저 만나는 ‘목격자’이자, 참여자로 끌어들인다.
중심 서사는 마태복음 26~27장을 기반으로 한 ‘역사적 사건’이다. 성경을 바탕으로 한 레치타티보가 복음사가(테너)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복음사가는 스토리텔러이자 내레이터로 관객을 이끄는 역할이다. 이날 공연에선 홍민섭이 맡았다.
사건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것은 시인 피칸더의 시에 곡을 붙인 아리아다. 성경 속 사건을 바라보는 개인의 반응이 슬픔, 참회, 동요 등을 통해 정서적으로 펼쳐진다.
마지막은 신앙 공동체의 신학적 해석을 맡는 코랄이다. 독일 루터교 찬송가다. 코랄은 각각의 드라마 장면마다 등장, 신도들의 공동 고백과 기도를 음악적으로 표현한다. 비극적인 수난의 현장을 신학적 구원의 서사로 연결하는 가교 구실을 한다. 기독교인이라면 실제 찬송가의 대목도 발견할 수 있다.
이날의 무대 위에 배치된 오케스트라와 이중 합창단은 사뭇 장엄하기까지 한 진용으로 무대에 도열했다. 지휘자를 중심으로 목관악기도 양옆으로 배치한 것도 흥미로웠다. 현대의 오케스트라에선 마주하기 어려운 바로크 목관악기들은 한국 연주자들의 손에 의해 섬세하게 조율돼 자리했다. 오보에 다모레, 오보에 다 카차, 트라베르소를 비롯해 쳄발로와 오르간을 포함한 32대의 바로크 악기가 들려주는 고졸하고 투명한 음색은 현대 악기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시간의 층위’를 만들어냈다.
마태수난곡은 음악 전체가 십자가 형태를 띠고 있다. 음악학자들은 작품의 중심축을 기점으로 앞뒤의 곡들이 주제적, 조성적으로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고 봤다. 고대 성서 문학 구조인 ‘키아즘’(A-B-C-D(중심)-C′-B′-A′)의 형태다.
![김선아가 지휘한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과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의 ‘마태수난곡’에서의 소프라노 황수미 [프레스토컴퍼니 제공]](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3/ned/20260313002208878utcp.jpg)
‘마태수난곡’에선 ‘예수의 체포’(D)를 중심에 두고 시작(A)-겟세마네(B)-베드로의 부인(C)으로 나아간 뒤, 재판(C′)-십자가(B′)-장례(A′)로 이어진다. 바흐는 키아즘을 음악 드라마의 구조로 번역, 예수의 체포를 중심으로 앞뒤 음악이 서로 대응하도록 곡을 썼다. 시작의 합창(A)과 마지막 합창(A′)에선 똑같이 느린 춤곡 리듬을, 겟세마네와 십자가에선 나란히 예수의 고통을 다루며 느린 템포와 현악, 명상적 레치타티보를 사용한 것이다. 바흐는 악보에서도 특정 성부의 음표들을 연결하면 십자가 모양이 나오게 설계했다.
음악은 쉴 새 없이 흘러갔다. 김선아 지휘자는 도입부의 합창부터 다소 빠른 박자로 관객의 몰입을 높였다. 이 곡이 ‘장례식의 애가’가 아닌 구원을 향한 긴박한 드라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좌우로 선 두 합창단이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을 때, 사람의 목소리를 응축한 고악기의 입체적인 음향은 청중을 소리의 소용돌이 한복판으로 몰아넣었다.
서사를 이끄는 복음사가 역할의 홍민섭은 기량이 놀라웠다. 그는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객관적인 전달자이자 목격자의 위치에서 절묘하게 줄타기를 하니, 청중 역시 사건의 관찰자이자 참여자로 대서사시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다. 특히 예수가 체포되는 긴박한 순간이나 베드로의 배반 장면에서 들려주는 선동적이고도 비통한 레치타티보에 객석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예수 역의 베이스 우경식은 흔들림 없는 안정된 음색으로 극의 중심축을 잡았다. 담담한 위엄은 고난 앞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는 예수를 온전히 그려냈다. 예수의 노래 뒤로 흐르는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의 현악기가 만들어낸 음악적 후광은 성스러운 경외감마저 들었다.
![김선아가 지휘한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과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의 ‘마태수난곡’에서의 소프라노 황수미 [프레스토컴퍼니 제공]](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3/ned/20260313002209213ajye.jpg)
마태수난곡은 교회의 음악이지만, 이보다 더 강렬한 드라마는 없었다. 모든 고난을 짊어진 한 인간의 역경은 그 어떤 TV 드라마보다도 숨가빴다. 한 편의 오페라를 방불케 하는 서사와 음악이 이어졌다. 소프라노 황수미는 순결하고 맑은 목소리로 기쁨과 슬픔을 오갔다. 노래마다 달라지는 그의 음색과 표정은 이 곡을 더 드라마틱한 오페라로 만들었다.
마태수난곡은 대체로 성스러운 여정을 담고 있지만, 세속적 음악 언어도 곳곳에 들린다. 사라방드 춤 리듬을 입은 알토 아리아 ‘불쌍히 여기소서(Erbarme dich)’는 정서적 클라이맥스를 완성했다. 카운터테너 정민호는 인간의 육성을 넘어선 영적인 울림을 줬다.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통한의 심경이 솔로 바이올린과 구슬픈 선율로 주고받으면, 그의 통곡은 이내 위로의 숨결이 된다.
마태수난곡의 절정은 군중 합창에서 시작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Laß ihn kreuzigen)고 외칠 때 짧고 날카로운 리듬, 복잡하게 뒤엉킨 대위법적 선율은 집단 광기와 폭력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의 합창은 때론 성난 군중처럼, 때론 슬픔에 젖은 제자처럼 극단적인 심리극을 보여줬다. 이와 완전히 대비되는 코랄 곡은 정갈하고 투명한 화음으로 공동체가 그리는 치유의 힘을 들려줬다.
김선아 지휘자는 3시간 동안 곡의 흐름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팽팽하게 유지했다. 지나친 감상으로 빠지지도, 그렇다고 학구주의에 매몰되지도 않으면서 ‘마태수난곡’을 온전히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마지막 음이 사라지고 나서도 약 10초간 이어진 정적은 인간의 죄와 신의 침묵이라는 거대한 운명 앞에 마주 선 영혼의 떨림이었다.
그는 “종교 음악은 메시지를 담는 그릇과 같다고 단원들에게 이야기한다. 메시지가 고귀하면 그것을 담는 그릇도 그에 걸맞게 아름다워야 한다”며 “매끈하고 단단한 놋그릇이 될 때까지 노력하겠다. 3년 뒤에도 다시 ‘마태수난곡’으로 돌아오겠다”는 소감을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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