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리오갤러리서 4월 18일까지 손가락질 받던 여성 소환해 가부장제 통념 정면 비판 女주체성 탐구 연작 한자리
박영숙의 ‘미친년들 #7’(1999) <아라리오갤러리>
살림과 육아의 난장판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매니큐어를 칠하고 단장한 여성이 정면을 쏘아본다. 또 다른 사진 속 여성은 아기라도 되는 양 베개를 소중히 끌어안은 채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한복 저고리를 풀어헤친 채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리는 여성도 있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미친년’이라 손가락질하며 격리하고 가두려 했던 여성들의 모습이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웠다. 한국 여성미술사의 상징작으로 자리 잡은 고(故) 박영숙 작가의 ‘미친년들’ 연작이다.
박영숙의 ‘미친년들 #1’(1999) <아라리오 갤러리>
한국 페미니즘 사진의 대모이자 선구자로 불리는 박영숙 작가의 작업 세계를 총망라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지난해 10월 작가가 별세한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유고전 ‘보라, 저 여자가 노래하고 춤춘다’가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1963년부터 2005년까지 약 40여 년에 걸쳐 여성의 삶과 신체를 집요하게 기록해온 작가의 예술적 궤적을 사진 41점과 영상 1점,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조망한다. 전시명은 김혜순 시인이 작가에게 선물한 시 ‘꽃이 그녀를 흔들다’의 시 구절에서 따왔다.
박영숙의 ‘미친년들 #5’(1999) <아라리오 갤러리>
전시의 중심인 ‘미친년들’ 연작은 1999년 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 전시 당시 제작된 것으로, 사회적 통념에 의해 터부시되어 온 여성들을 전면에 소환한다. 작가는 가부장제라는 견고한 틀 안에서 규범을 벗어난 여성들에게 가해진 ‘미친년’이라는 낙인을 주체적인 에너지로 전복시켰다. 사회가 손가락질하던 그들의 모습 속에서 오히려 뒤틀린 시대의 통념을 날카롭게 꼬집은 것이다.
박영숙의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 #1’(2002) <아라리오 갤러리>
박영숙의 카메라가 응시하는 여성들은 수동적이지 않다. ‘갇힌 몸 정처없는 마음’ 연작은 가사 노동의 굴레 속에서 일탈을 꿈꾸는 주부들의 내면을 포착했다. 여성 신학자 정현경 교수 등을 모델로 한 ‘내 안의 마녀’ 시리즈는 창의적이고 당당한 여성상을 통해 ‘마녀’라는 멸칭을 주체적 존재의 상징으로 탈바꿈시켰다.
박영숙의 ‘내 안의 마녀 #5’(2005) <아라리오 갤러리>
‘꽃이 그녀를 흔들다’ 연작에서도 여성들은 도발적인 포즈로 카메라를 정면 응시한다. 여성을 연약한 꽃에 비유하던 기존의 시각을 뒤집으며 여성을 관찰의 대상이 아닌, 자기 삶의 주관자로 묘사하려는 의지다.
박영숙의 ‘꽃이 그녀를 흔들다 #5’(2005) <아라리오 갤러리>
이번 전시에서는 1994년 발표된 영상 작품 ‘자궁의 노래: 이제 크신 어머니 자고 깨니’가 디지털 판본으로 복원돼 공개된다. 가수 한영애, 윤석남 작가, 김영 목사 등이 참여한 이 작품은 생명을 창조하는 여성의 능력을 보여준다.
박영숙의 ‘마녀’(1988) <아라리오 갤러리>
작가의 전성기뿐만 아니라 그 뿌리가 된 1960~1980년대 초기 작업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흑백 사진 6장을 나란히 이어 붙인 1988년작 포토콜라주 ‘마녀’는 작가의 의식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지점이다. 작품 좌측 하단에 ‘중세, 마녀사냥에 충격받아 페미니스트 되다‘라고 직접 적어 넣은 문구는 그가 평생을 매달린 여성주의 작업의 출발점을 짐작케 한다.
박영숙의 ‘장면 24’(1965) <아라리오 갤러리>
마녀를 연상시키듯 머리를 풀어헤치고 망토를 둘러쓴 여성, 묵묵히 일하는 여성들의 초상 등 20대 시절부터 포착해온 초기작들에서는 일찍부터 여성의 존재 방식에 천착했던 작가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임신한 여성의 몸과 꽃을 연결해 신체를 새롭게 해석한 ‘장미’는 이후 1998년 중년 여성의 나체와 꽃을 합성한 사진 ‘육체 그리고 성’ 시리즈로 이어진다.
트렁크갤러리(2006-2018) 사무실의 박영숙 <아라리오 갤러리>
평생을 카메라 뒤에서 여성들의 해방과 연대를 위해 싸웠던 박영숙 작가. 그가 남긴 강렬한 기록들은 여전히 ‘저 여자가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전시는 4월 18일까지.